출판사 서평
기계는 인간을 살해하고 인간은 같은 인간을 사냥하는 세계
살아 있는 것들, 살아 있지 않은 것들,
살아 있을 수 없는 것들, 이름 없는 것들이 엉켜 벌이는 사투
지금 ‘순리’는 어긋나고 ‘폭력’과 ‘억압’의 체계는 무너진다!
『이름 없는 것들의 밤』의 세계관을 여는 1부 「밤이 오면 우리는」은 우리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시의성 있는 주제에서 출발한다. 20세기 인류의 가장 중대한 실수였던 ‘핵실험’과 그 핵실험을 둘러싼 강국들의 견제와 이어진 전쟁……. 그러한 상황 속에서 결국 “인간의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행성 전체가 멸망할 것이었다”. 이에 “편견이 없고 공정”하게 사고하는, 합리적인 매체인 ‘기계’에게 인류는 미래를 맡긴다. 그리고 로봇은 “지구상 다른 모든 생물종을 위한 최선의 안전장치는 인류 문명의 종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정작 이 이야기에서 인간을 가장 잘 죽이는, 인류 최대의 적은 공교롭게도 ‘기계’가 아니다. “인간을 죽이는 일에” 특화된 건 같은 인간이다. 이들에 맞서 인류 문명을 지키겠다고 저항에 나선 이들 중에는 물론 인간도 있지만,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나’와 같은 ‘흡혈인’이 큰 축을 이룬다. 이에 더해 “난 사람이에요”라고 주장하는 인조인간의 등장은 무엇이 인간인가, “인간의 조건”이란 무엇인가라는 소설의 질문을 끊임없이 곱씹게 한다. ‘인조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죽은 존재가 있었노라고.
이어지는 2부 「예언자」는 「밤이 오면 우리는」의 등장인물인 ‘마리카’라는 여성 인물에 집중한, 일종의 1부의 ‘프리퀄’ 격인 이야기이다. 정보라 작가는 이 작품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및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는데, 실제로 「예언자」는 기계-로봇의 지배 이전, 중등 교사였던 마리카의 나라가 식민지가 되면서 학교에 생긴 변화들을 실감 나는 묘사로 그려낸다. 식민 국가가 점령지민들로부터 자본, 나아가 ‘존엄’마저 빼앗는 상황은, 한국인이라면 떠올릴 수 있을 근현대사의 몇 가지 사건들을 연상케도 하며 독자를 이야기에 깊숙이 집중시킨다. 와중에 ‘적’의 국가와 대기업은 점령지의 사람들의 노동과 학습을 모두 기계로 대체하며 그에 필요한 기계의 임대료와 수리비를 청구하는 등 전쟁 상황과 기계-로봇의 지배가 교묘하게 섞이면서, 혼란을 야기한다. 말미에 이르러 ‘마리카’를 비롯해 독자가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꽤 충격적인 것이다.
3부 「우리는 모두 악마에게서 왔다」는 「밤이 오면 우리는」 이후 시점을 다룬다. 「밤이 오면 우리는」에서 지구는 인간이 적어졌지만 그래도 생물종의 보존이 이뤄지고 있는 곳으로 그려졌으나, 3부의 시점에 이르러서는 계속되는 공습으로 당초 기계-로봇의 목표 중 하나였던 생물종의 보존은 옛이야기가 되었으며 더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다. 흡혈인도 눈에 띄게 줄어 은신하고 있던 ‘나’에게 자신이 ‘마리카의 아이’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찾아오며 소설은 시작된다. ‘인간의 적으로서의 인간’을 배양하기 위해 기계가 인간 여성을 이용하고 그렇게 태어난 인간들은 마약으로 통제하고 있었던 현실이 ‘특수작업공장’이라는 배경 아래 처참하게 펼쳐진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3부의 결말에 이르러 그 가능성을 품은 존재들은 다름 아닌 ‘이름 없는 것들’, 즉 자신의 이름으로 살 수 없었거나, 자신의 자리가 없던 것들이다. 『이름 없는 것들의 밤』에서는 ‘장애’를 지닌 흡혈인, 본인이 로봇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로봇, 점령국의 여성, 결혼이 강제되는 사회에서 남성으로 살고 싶지 않았던 남성, 다양한 것들을 갈아 먹여 무엇도 아닌 냄새를 풍기는 ‘개’ 등의 비인간까지 본래라면 주목받지 못했을 소위 ‘바깥’의 존재들이 중심인물로서 서사를 이끌어간다. 1부에서 3부에 이르기까지 정보라 작가는 시종일관 이들을 말미암게 한 “폭력적인 집단, 비인간적인 체제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표하며,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연약하고 부드러워도 되는 세계”를 꿈꾼다. 이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의 열쇠는 바로 이들이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 “순리를 거스르고 폭력과 억압의 체계와 싸워 무너”뜨릴 “세상의 모든 비이성적인 존재들”, 지금껏 이름을 가진 적 없던 이들에게 말이다.
· 작가의 말
세상은 ‘신’과 ‘악마’, 무조건적인 선과 무조건적인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다. 인간은 단순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하고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한, 알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단 한 번만 세상에 존재하며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단 한 번만 경험하는 모든 순간 속에서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사랑하고, 다치고 병들고, 늙고, 죽는다. 모든 인간은 작고 연약하고 무지하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힘의 논리를 강요하며 인간존재를 자기들의 이득에 맞춰 바꾸려는 집단이나 체제가 있었다. 1부와 2, 3부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이런 폭력적인 집단, 비인간적인 체제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연약하고 부드러워도 되는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_「작가의 말」 중에서
책 속으로
기계들의 반란은 공상과학소설의 단골 소재다. 기계들의 반란이 실제로 일어나면 옛날 소설가들은, 예를 들어 집에 있는 세탁기나 청소기나 나의 목숨을 위협할 것이라고 상상했던 것 같다. 그들은 틀렸다. 인간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언제나 인간이다.
---「밤이 오면 우리는」중에서
“빌리라고 한 거, 나죠? 티셔츠에 그렇게 적혀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 거예요?”
“똑똑하네.”
내가 대꾸한다.
“고마워요.”
빌리가 말했다.
“뭐가?”
마리카가 무심하게 물었다. 빌리가 조용히 대답했다.
“사람 이름을 지어줘서요.”
---「밤이 오면 우리는」중에서
노예의 순리는 필요 없다. 나도 나의 죽음을, 내 죽음의 의미를 스스로 선택할 것이다. 햇빛 아래 재가 되어 사라지거나, 끝없는 밤하늘 아래 목이 잘리거나. 어느 쪽이든, 오늘은 아니다.
---「밤이 오면 우리는」중에서
교육받을 권리를 빼앗긴 아이들, ‘실습’이라는 이름의 공짜 노동에 시달리며 침략자의 나라에서 고객들이 늘어놓는 불평과 변덕에 따라 앞날이 결정되는 아이들, 강제로 적의 군복을 입고 군사훈련을 받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그녀는 점령지의 선생이란 오히려 학생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닌지 고민했다. 그녀는 지금 적들이 정한 착취 체계의 한 부품이 되어 아이들에게 점령 상황에 순응하는 법, 침략자가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교사가 된 이후 그녀는 학교가 아닌 곳의 삶을 단 한 번도 원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버리고 떠난다고 뭔가 더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예언자」중에서
살아 있으면 다시 만날 수 있고 살아 있으면 계속 일할 수 있었다.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다시 저항할 수 있었다. 살아서 존재하는 것이 곧 저항이었다.
---「예언자」중에서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그녀는 받아들였다. 그녀의 입에서 예언의 말씀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기계와 같이 될 것이다.
그녀는 세상을 향해 예언자의 첫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기계가 될 것이다.
---「예언자」중에서
나는 조금 웃었다. ‘숨을 죽이고’. ‘안도의 한숨’. 이것은 모두 우리가 아직 인간이었을 때 자기도 모르게 하던 행동들이 아직까지 무의미한 습관이 되어 남은 것이다. 윌버도 나도 ‘살아 있지 않다’. 숨을 쉬지 않아도 우리는 ‘죽지’ 않는다. 그러나 밖에서 수상한 기척이 들리면 윌버도 나도 동작을 멈추면서 동시에 숨을 참는다. 습관이란 끈질긴 것이다.
---「우리는 악마에게서 왔다」중에서
“우리는 다 망가졌어. 모두 다.”
낯선 사람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난 망가졌다는 게 어떤 건지도 몰랐어.”
그렇게 망가져가고 있을 때 마리카의 기억을 담은 로봇이 찾아와 마리카의 아이에게 알려주었다.
“장벽 바깥에는 끝없는 어둠 속에서 적의 피를 마시는 존재들이 있다고, 그들에게 가라고 했어. 그들에게 가면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우리’는 악마에게서 왔지만 ‘나’는 신에게서 왔다고. 그러니까 신이 주신 내 모습대로 살아가라고 했어.”
---「우리는 악마에게서 왔다」중에서
마리카는 저 안에 갇혀버렸는지도 모른다. 공장이 무너지면 마리카도 없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다. 나는 혼자 고개를 흔들었다. 통신망 안으로 녹아 흩어진 의식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옥은 기계 속으로 침투했다. 마리카도 기계 속에 있다. 내가 소멸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어딘가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우리는 악마에게서 왔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