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지배와 해방, 그 심원하고 실재적인 대립
슬라보예 지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1989)에서 라캉과 알튀세르 사이의 논쟁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이 마치 당대의 가장 심원하고 진정한 대립인 듯이 말하며 이 논쟁의 주관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철학과 이론의 영역에 기입하였다.
지젝의 문제 제기로부터 10년 후, 워런 몬탁은 지젝처럼 수다스럽고 자극적인 방식이 아니라 얼마간 생소한 방식으로 (지젝이 한참 후에야 몰두하게 될) 보다 심원하고 실재적인 논쟁을 제기한다. 알튀세르를 그가 이론적으로 인지한 적조차 없는 미국 사회학의 대가 조지 C. 호먼스(George C. Homans)와 대립시키는 방식인데, 알튀세르의 이론적 반-인간주의와 호먼스의 철학적 인간학이라는 독특한 대립을 통해 몬탁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유물론과 관념론의 타협 불가능한 대립이다.
하지만 이는 박제화된 철학사 내부의 논쟁이거나 역사적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무의미하고 철지난 것으로 여겨지는 대립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지배와 해방의 해소 불가능한 대립’이라는 근본적 문제다. 따라서 그에게 철학은 “내적 갈등들의 해결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진보의 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해결할 수 없는 갈등과 무한한 반복의 장소”, 즉 정치의 장소가 된다.
정치적 몽유병으로부터 깨어나기
몬탁은 오늘날 당연시되는 자유주의와 소유적 개인주의가 발아하기 시작한 근대로 거슬러 올라가 스피노자와 홉스/로크의 대립을 해방과 지배의 대립이라는 틀로 복원해 낸다. 이 대립에서 성서 해석/문자, 신체, 권리, 역량, 대중의 공포는 첨예한 쟁점이 된다. 경험론과 합리론이라는 근대철학의 통념적인 대립은 정신과 신체의 대립이라는 새로운 대립으로 대체되며, 또한 그러한 대립의 위치에 그들을 자리 잡게 만드는 것은 사고의 경향이 아니라 (철학자들 또한 하나의 신체로서 외부의 힘에 의해 규정될 뿐이기에) 그들 외부의 힘으로서 양가적인 대중들의 공포임이 밝혀진다.
자율적인 주체와 이 주체의 본질로서 정신에 대해 신체의 우위성이 자리 잡게 되면, 세계란 종속된 신체들 그 자체이다. 이 세계 속에서 몬탁의 목표는 “의식을 잠에서 깨우고, 자신들의 행위들을 결정하는 힘들을 알지 못하므로 행위들을 바꿀 수도 없으면서 그들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자신들이라며 꿈꾸고 있는 개인들을 정치적 몽유병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스피노자가 지향하는 새로운 유물론의 목표이다. 몬탁은 『윤리학』 3부 정리 2의 주석, 즉 “누구도 정신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신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알지 못했다”라는 명제를 스피노자 유물론의 원리로 삼아 지배와 해방에 관한 다음의 세 가지 논제를 탐구한다.
하나, 신체의 해방 없이는 정신의 해방은 있을 수 없다.
둘, 집합적 해방 없이는 개체의 해방은 있을 수 없다.
셋, 이러한 정리들은 그 자체로 물체적 실존을 소유한다. 즉, 언제나 효과 속에서 실존한다.
이와 같은 몬탁의 연구는 그 자체로 물체적 실존을 소유하면서(즉, 읽는 이들에게 효과를 발휘하면서) 어떤 굴절도 없이 육박해 가는 스피노자에 대한, 그리고 스피노자로부터 시작하는 철학/정치에 대한 연구인 동시에 예속에서 해방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길이다.
스피노자의 동시대인은 누구인가?
책의 제목으로 쓰인 세 개념, 즉 신체, 대중, 역량은 스피노자를 해방의 기획으로 읽어 낼 수 있게 하는 데 있어 단초가 되는 개념들이다. 알튀세르, 들뢰즈, 네그리, 발리바르 등 현대의 주요 좌파 철학자들이 스피노자에 준거할 때 앞서 언급한 개념들을 선택적으로 중심으로 삼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개념이 만들어 내는 삼각형의 힘은 (네그리가 『야만적 별종』에서 스피노자를 지칭하는 데 사용한 용어인) 어느 ‘별종’에 대한 이론적 탐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효과 속에 실존한다. 정신과 자율적 주체, 계약, 공포라는 미신을 찢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몬탁의 기획이다. 네그리의 말을 빌리자면, “이 아름다운 책에서 몬탁은 스피노자의 정치적 존재론이 민주적인 역량에 형태를 부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중의 신체에 창의성을 부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책의 부제에 들어 있는 스피노자의 ‘동시대인들’이란 누구일까? 스피노자가 활동했던 철학적 고전주의의 시대의 인간인가? 철학사와 역사가 분류하는 근대인인가? 스피노자 사후 여전히 지배와 해방의 대립, 철학적 투쟁이 반복되고 있다면, 그의 동시대인들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인간들이 아니라 사회의 ‘예외들의 예외’가 되어 가는 우리, ‘얼굴’이 지워져 가고 있는 우리, 그러나 실존만큼이나 지속적인 이행의 과정에서 예속으로부터 해방으로 나아가는 길 위에 있는 우리, 즉 대중들이다. 신체의 유물론은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각자도생의 사회 속에서 나날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삶의 역량들이 지속적으로 위축되는 상황이다. 기쁨보다는 슬픔의 정서가 지배적이고, 언젠가 자신의 삶이 파괴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늘 사로잡혀 있다. 도무지 나아질 길이 없는 삶의 나날들에서 절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헛되이 희망하지도 않으며 삶을 굴절 없이 이해하고 자신을 온전히 지켜 내기 위해 우리는 몬탁의 세 가지 논제를 다시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타인의 해방 없이는 한 인간의 해방도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은 언제나 효과 속에서 실존한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