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한국 사회가 암묵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정상’ 부모-가족상은 일정한 경제적 안정성, 안정된 고용, 적절한 주거 환경, 그리고 양육을 감당할 수 있는 시간과 자원을 갖춘 이성애 부부다. 이러한 기준은 제도와 시장, 그리고 사회적 기대를 통해 반복적으로 강화되며, 도달하기 어려운 특정한 삶의 형태를 사실상의 표준으로 만든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집단만이 안전하게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도록 작동하는 한국 사회의 구조는 출산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부모가 될 수 있는지를 선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 책에서는 ‘정상 부모’를 선별하는 이러한 사회구조를 ‘구조적 우생학Structural Eugenics’이라 정의할 것이다. 저출생은 구조적 우생학이 축적된 결과다. 누가 태어날 수 있고, 누가 태어날 수 없는가를 결정하는 사회의 깊은 구조, 즉 0.72라는 숫자 아래 감추어진 구조적 우생학의 작동을 드러내야만 우리는 이 문제의 본질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다.
_6~7쪽,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나라, 감추어진 우생학〉에서
구조적 우생학은 이러한 소득 격차, 성차별, 돌봄의 책임 편향, 비정상적인 가족주의가 각각 독립적인 문제가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작동하는 사회구조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소득 하위 계층의 출생률 하락이 더 가팔랐던 이유는 경쟁에서의 실패를 개인의 책임과 무능력으로 돌렸고, 제도적 가족주의가 그 책임을 다시 가족 내부로 환원시켰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추가적인 구조적 장벽이 있었다.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 특히 불안정한 저임금 일자리에 종사하는 여성은 출산의 가능성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낮아진다. 국가가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이 만들어낸 극단적인 소득과 부의 양극화, 성차별적 노동과 돌봄 관행을 용인하며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제도적 개입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 형태가 전통 사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음에도 가족에 의존하는 선별적 복지를 유지함으로써 한부모가 아이를 더 가질 가능성을 크게 낮추고, 이성애 규범에 의존한 정책을 유지함으로써 성소수자의 재생산권을 제한했다. 구조적 우생학으로 인해 우리는 지나친 불평등과 차별, 경쟁의 부작용으로 혐오가 만연하여 위험한 사회에서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보다 평등하고 인간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사람들로부터 양육될 수 있었던 아이들마저 잃어버린 인구구조를 갖게 되었다.
_10~11쪽,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나라, 감추어진 우생학〉에서
젊은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아이를 낳는 것이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다”는 그들의 인식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다시 “자신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지 못하게 하는 노동 현실”과 이어진다. 윤하영 씨의 친구 중에는 취업한다 해도 근로기준법조차 안 지키는 기업이 너무 많아 두세 달 만에 퇴직을 고민하고 있고, 결국 반년 정도 버티다 나와 다른 직장을 찾는 경우가 흔하다. 윤하영 씨는 “이성 결혼을 해도 쓰기 힘든 육아휴직을 자신이 평범한 직장에 취업해서 쓸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렇다고 “시민단체에 들어간다면 그 월급으로 아이를 키우기는 어려울 것”이 명백하다. 설사 아이를 낳더라도 “낳음당했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극단적인 경쟁 사회에서 느끼는 실존적 부담과 박탈감이 응축된, 삶 전체에 비판적 감각을 가진 불행한 청년으로 자라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윤하영 씨에게 저출생은 우리 사회가 받아들여야 하는 어떤 숙명일 뿐이다.
_58~59쪽, 〈성차별을 거부할 수 없는 사회〉에서
이 일련의 연구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한국의 저출생이 단순히 경제적 문제나 가치관 변화 때문이 아니라, 출산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불균등하게 배분된 사회구조의 결과라는 점이다. 출산은 형식적으로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지만, 실제로는 돌봄을 함께 수행하는 관계,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가구, 그리고 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고 느끼는 소수에게만 ‘허락’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출생은 단순한 인구 감소가 아니라, 누가 부모가 될 수 있는지를 사회가 암묵적으로 선별하는 과정이며, 여기서 제안하는 구조적 우생학은 바로 이 기제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한국 사회의 극단적인 저출생은 성평등 혁명의 미완성이라는 구조가 만들어낸 인구학적 대가다.
_94~95쪽, 〈돌봄의 책임 편향-개인화·성별화된 돌봄의 덫〉에서
정교하고 까다로운 선별 기준을 만들어낸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양육의 높은 기준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것을 제공할 수 있는 충분한 재력을 통해 자녀 세대의 계층 하락 위험을 제거할 수 있는 경우, 부모가 될 가능성이 크게 높아진다. 이런 사회의 무모한 경쟁에 반대하고, 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잔인한 차별을 힘들어하며, 인간적인 삶의 기준을 높이 평가할 경우, 부모가 될 가능성이 크게 낮아진다. 강지훈 씨가 그런 사례이다. 그는 노동 시간이 적은 사회를 꿈꾼다. 기본적으로 주 30시간 이하로 일하면서 서로 돌보는 시간, 가족을 포함한 지역공동체를 돌보는 시간을 늘렸으면 좋겠다. 노동 시간이 적다면 아내와 즐거운 일을 많이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아내의 불안도 자연스럽게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불행하게도 아직 그런 사회가 아니다.
_144쪽, 〈가족을 해체하는 가족주의〉에서
이 연구의 결론부터 말하면, 출생 시점부터 동성 부모에게서 자란 아동은 사회경제적 격차 등을 통제한 이후에도 이성 부모 가정의 아동보다 학업 성취가 높았다. 나중에 동성 부모와 살게 된 아이들은 이성 부모 가정의 아동보다 학업 성취가 낮거나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는데, 저자들은 이를 동성 부모 효과가 아닌 부모 이혼 및 불안정한 가정 효과로 해석한다. 이는 아동이 양성의 부모를 모두 필요로 한다든가, 동성 부모 중 한 명은 생물학적으로 아동과 관련이 없을 수 있고 동성 부모에 대한 사회의 차별이 존재하므로 이들이 불리할 것이라는 기존 이론을 모두 뒤엎는 결과이다. 이 연구는 오히려 반대의 논리를 제시한다. 동성 부모가 아이를 얻기 위해서는 생식 보조 의료의 도움을 받거나 입양 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비용을 지불해야 함은 물론 부모됨을 가로막는 여러 차원의 장벽과 차별을 마주해야 하는데, 이런 과정을 통과한 부모들은 이를 보상하기 위해 이성 부모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더 나은 부모가 되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연구의 저자들도 이런 결과가 동성 부모에게 매우 우호적인 문화적·법적 맥락이 존재하는 네덜란드에 한정된 결과로, 국가별 차이가 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들이 인용한 2015년 유럽연합에서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스웨덴 다음으로 동성 부모에 대해 호의적인 국가였다. 국민의 거의 전부인 96%가 동성애자는 이성애자와 동일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또 86%가 자녀가 동성과 관계를 맺어도 편안하게 받아들인다고 응답했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제도적 가족주의가 동시에 작동하는 한국에서라면 동성 결혼이 아동에 미치는 복리에 있어 다른 결과가 나타났을까? 우리는 그 답을 모른다. 동성 부부가 부모가 될 수조차 없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_172~173쪽, 〈가족을 해체하는 가족주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