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도도 솔솔, 도도 솔솔…”
이렇게 우는 산새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산에 가면 자주 들을 수 있는 흔한 새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귀 기울여 듣고 있으면 마치 누군가 피리라도 부는 듯 아련한 음정이 마음속으로 스며듭니다.
이 책의 집필을 거의 마치고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뒤, 잠시 숨을 돌릴 겸 시골 숲속 농막에 다녀왔습니다. 봄 가뭄에 고추와 채소는 잘 자라고 있는지, 한창 무성해진 마늘과 양파는 어떤지 살펴볼 겸 하루 이틀 머물다 왔습니다. 멀칭을 해두어 잡초가 아주 심하지는 않았지만, 밭고랑과 줄기 사이사이로 풀들이 무성하게 올라와 있었습니다. 쇠비름, 쇠뜨기, 쑥, 애기똥풀, 쥐오줌풀, 토끼풀, 환삼덩굴, 며느리밑씻개… 사람 손이 가지 않아도 풀들은 참 잘 자랍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아이들이 한창 자랄 때는 저 역시 이런 풀들의 이름조차 잘 몰랐습니다. 주말이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산이나 들로 나가곤 했습니다. 아이들은 꽃을 보며 “아빠, 이 꽃 이름 뭐야 ” 하고 물었고, 새소리가 들리면 “저 새는 뭐야 ” 하며 재잘거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대로 대답하지 못해 머쓱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꽃 이름도 새 이름도 조금 더 알고, 꽃말이나 사연도 이야기해줄 수 있었다면 아이들에게 더 따뜻한 추억을 남겨줄 수 있었을 텐데, 이제 와 문득 아쉬워집니다.
산에는 참 많은 생명들이 서로 기대어 살아갑니다. 한낮이면 뻐꾹새 울음이 숲에 퍼지고, 장끼와 까투리가 퍼드득거리며 날아오르면 나도 덩달아 정신이 번쩍 듭니다. 밤이 깊어지면 먼 데서 들려오는 고라니 울음, 구구 구구 멧비둘기 소리, 그리고 소쩍 소쩍 구슬프고 애처롭게 들려오는 소쩍새 울음이 이불 속까지 스며듭니다.
어릴 적 할머니는 손자들에게 소쩍새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습니다. 옛날에는 식량이 부족해서 작은 솥으로 밥을 지어 어른들 밥 퍼드리고 아이들 먹이고 나면 며느리 몫은 누룽지 조금 남는 날도 많았다고 하셨습니다. 배고픔과 서러움 속에서 살던 며느리가 밤마다 “솥 적다, 솥 적다” 울다가 소쩍새가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또 며느리밑씻개라는 풀 이름을 두고도 할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며느리가 얼마나 시샘이 나고 미웠으면 저 따갑고 성가신 풀로 뒤처리나 하라 했겠노…”
며느리밑씻개는 줄기와 잎에 가시 같은 돌기가 많아 스치기만 해도 따갑고 피부에 상처를 내는 풀입니다. 밭을 매다가 이 풀이 몸에 감기면 여간 성가신 게 아닙니다. 그러니 옛사람들은 밭일하는 사람을 자꾸 찌르고 감기는 이 풀을 보며, 미운 며느리에게나 가서 그 성질을 부리라는 심통으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이야기들 속에는 우리네 삶의 애환과 웃음, 시샘과 한숨과 정, 그리고 시대의 고단함까지 함께 얽혀 있었습니다. 자연은 단지 배경이 아니었습니다. 옛사람들은 새소리와 풀꽃과 바람 속에서 삶의 감정을 읽어냈고, 자연과 교감하며 살아왔습니다.
영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Knowing them, we value them.” 아는 만큼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꽃말이 왜 생겼겠습니까. 우리가 잡초라고 부르는 풀들도 대부분 나물로 쓰이고 약초가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서로를 알아갈수록 관계가 생기고, 관계가 생길수록 사랑과 배려도 깊어집니다.
이 글을 쓰는 저는 지금 시골 농부입니다. 작은 텃밭과 산속 농막을 오가며 소농을 짓고 있고, 몇 해 전부터는 자연휴양림에서 다섯 분의 동료들과 함께 제초와 수목관리 일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다들 인생의 굽이굽이를 지나온 분들입니다. 사업 실패를 겪은 분도 있고, 가족과의 아픔을 안고 살아온 분도 있으며, IMF 시절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일어선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의 풍파를 견딘 사람들의 얼굴에는 묘한 순수함과 따뜻함이 남아 있습니다. 저는 요즘 그분들과 함께 지내며 다시 ‘인생의 노인대학’을 다니는 기분을 느낍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생이 됩니다. 누군가는 기계를 잘 다루며 고치고, 누군가는 농사를 잘 알고, 누군가는 사람 마음을 다독이는 법을 압니다. 또 어떤 분은 삶 자체가 다양한 체험활동으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들풀이며 산나물, 버섯, 수종, 산짐승, 세상사 일들을 잘도 알고 있어서 우리는 그를 만물박사라 부르기도 합니다. 책에서 배운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낸 지혜들입니다.
한때 저도 교직 생활을 했습니다. 1980~90년대, 민주화, 현대 산업사회로의 성장가도를 한창 달리던 시절이었어요. 서울의 봄, 민주화 운동, 88 서울 올림픽, IMF 등 격변기를 거쳐 오면서 교육계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교육의 선진화, 민주화를 이루며 권위적이던 교육체계도 많이 개선되어 갔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교사의 일방적 훈육이나 체벌도 많이 있었지요. 이제는 사회적으로도 큰 이슈가 될 사건이 되어버릴 정도로 사라졌습니다만, 저도 지나친 훈육, 체벌을 했던 기억도 있고, 지금은 많이 후회도 하고 반성을 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사제지간, 교사 간 끈끈한 정도 많았습니다. 서로를 아끼고 아픔을 보듬어주며 깔깔거리고 웃으며, 직장생활하는 교사들은 보람을 느끼고 배우는 아이들도 즐거운 학교생활, 추억의 학창시절이 되었습니다.
다만 식물을 가꾸며 살아보니 문득 그런 생각도 듭니다. 나무도 햇빛과 바람이 골고루 스며들게 가지를 솎아주고, 병든 부분은 잘라내야 더 튼튼하게 자랍니다. 주변의 덩굴이나 풀도 적당히 뽑아주어야 하고요. 인간 사회 역시 자유와 책임, 사랑과 절제가 함께 균형을 이루어야 건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날 농업은 제가 어릴 적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습니다. 생산량도 크게 늘었고, 친환경 농법도 점차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살아가는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저는 로버트 엑설로드의 게임이론을 떠올립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인류는 결국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길’, 곧 Win-Win의 길이 가장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길임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늘날 우리는 산업사회와 핵가족화 속에서 점점 더 고립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라는 감각은 희미해지고, 관계는 얕아지고, 인간적인 온기와 인정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마을 공동체와 놀이마당도 점점 기억 속 풍경이 되어갑니다.
언젠가 TV에서 안데스 산맥을 트레킹하는 한국 등산객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힘들고 외로운 긴 여정 끝에 잠시 들른 산중 휴게소에서 뜻밖에도 서로 다른 두 한국인을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은 대구 사람, 또 한 사람은 광주 사람이었습니다. 그 먼 타국의 산중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붙잡고 얼마나 반가워하던지, 보는 사람 마음까지 뭉클해졌습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오랜 외로움 끝에 같은 말, 같은 정서를 가진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저 숨통이 트이는 일이겠지요.
광주와 대구라면 우리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정치적 대립과 지역감정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곳들입니다. 그러나 안데스의 거대한 산맥 앞에서는 그런 경계가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그 순간 두 사람은 그냥 “우리”였을 것입니다. 저도 필리핀 외딴 섬으로 아내와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광주분 내외를 만난 경험이 있습니다. 얼마나 반갑고 좋았던지 연락처를 주고받고 후에도 안부를 물어가며 지낸 적이 있었답니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늘 그렇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작게 보면 서로 갈라져 다투지만, 더 넓은 세계 앞에서는 다시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화성에서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이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곳에서도 서로 등을 돌리고 싸우기만 할까요. 아마 어느 순간에는 이렇게 외치게 되지 않겠습니까.
“We are the Children of the Earth.”
“We are the Children of Abraham.”
“We are the World.”
결국 우리는 모두 같은 별에서 온 존재들입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납니다. 한쪽 날개만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방향을 틀 때는 어느 한쪽 날개가 더 크게 움직일 수도 있지만, 멀리 날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두 날개가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런데 서로를 향해 끝없이 비난하고 시샘만 하며 상대 날개를 꺾으려 든다면 새는 앞으로 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빙빙 돌 뿐입니다. 정치란 원래 대립과 협력의 균형을 조율하는 일일 텐데, 현실 속에서는 종종 국민을 분열시키고 편을 가르는 데 더 많은 힘이 쓰이는 듯 보입니다. 그것은 어느 한 나라만의 문제도 아닐 것입니다. 다가오는 인공지능 시대에는 이러한 고립과 분절이 더욱 심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묻고 싶었습니다.
인간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문명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우리는 경쟁만 하며 살아야 하는가.
이 책은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인간의 의식이 지금보다 더 넓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인간과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과 동식물, 그리고 기계와 인공지능까지도 서로 적대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 저는 그것을 하나의 꿈으로 품고 있습니다.
“I have a dream.”
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도 결국 거기에 있습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두려움, 그리고 아직은 늦지 않았다는 희망. 저는 이 전지구적 게임 속에서 패배자와 버려지는 존재 없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공존의 질서를 고민하고 싶었습니다. 이 책은 그 작은 문제 제기이자 서툰 제안입니다.
독일 철학에는 존재의 법칙(Sein)과 당위의 법칙(Solle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이 실제로 어떠한가를 넘어, 인간은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문명도 그 질문 앞에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을 회복하려는 의지, 서로를 살리려는 의식의 전환,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할 제도와 시스템이 함께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 글은 아직 미완입니다. 부족한 점도 많고, 서툰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문은 언제나 완성된 답이 아니라 미완의 물음에서 열려왔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담론과 성찰이 이어져 새로운 공존문명이 꽃 피어나기를 바라며, 부족한 이 글로나마 독자 여러분께 인사를 드립니다. 부디 저와 같이 한 명의 토론자의 시선으로 편안하게 읽어주시고, 함께 생각을 보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끝으로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애써주신 출판사 대표님과 편집위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또한 독수리 타법으로 휴대폰에 적어 내려간 제 초고를 컴퓨터로 옮겨주고, 자료를 찾아주며 함께 고민해준 아내와 두 아들 내외에게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제가 출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막막해하던 때 좋은 출판사와 인연이 닿도록 다리를 놓아준 조카와 교수님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덕분에 좋은 인연의 다리를 건너 이 책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참 고맙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2026년 5월 24일(부처님 오신 날)
충주의 작은 농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