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종소리로 기억하는 인류의 삶
이른 새벽 은은하게 울려 퍼지던 교회 종소리와 아침을 열던 자명종 소리,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던 교무실 종소리, 길거리의 자전거 종소리, 풍요와 평화의 상징인 외양간의 워낭 소리. 디지털 음향으로 대체되었을지라도, 종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종은 언제부터 인류와 함께 울고 웃었을까. 고대 중국에서 황제와 염제가 종을 처음 주조했다는 기록이 있고, 박물관에는 많은 은, 주나라 시대의 청동종이 전시되고 있다. 서양에도 3000년 전 바빌론 유물에 종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성경 탈출기(출애굽기) 28장은 “제사장의 복장에 종을 달아…”라고 기록했다. 종은 온 세상에 널리 분포하며 인류의 삶과 문화, 종교 그리고 염원을 담았다.
30여 년 동안 1만여 점의 종을 수집해 온 이재태 작가는 이번 책에서 소장품 중 역사·문화적 의미가 깊은 종을 골라 그 배경을 풀어냈다. 저자는 “종소리는 절대 권위와 함께 평화, 사랑 그리고 소통의 소리라 생각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는 ‘소통’이라 믿는다.”고 말한다. 종소리 인문학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통해 작은 탁상종에 남겨진 우리 삶의 흔적을 살펴보며 과거의 인류가 남기고자 했던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종, 인류의 문명 발전과 함께하다
종의 역사는 인류의 문명 발전과 같이한다. 옛사람들은 종소리가 자연 현상을 이길 수 있는 특별한 힘을 주고 역병과 마법에서 해방시켜 준다고 믿었다. 초자연적 신의 말씀을 들으려 종을 울렸고, 지배자들은 종소리로 자신이 신의 대리자라는 인식을 심으려 했다.
종의 가장 흔한 용처는 종교의식이었지만, 산업혁명 이후 시민의 일상에 편입되었다. 초기 구급차와 소방차는 경광등 대신 종을 치며 위급 상황을 알렸다. 제대로 멋을 낸 은제 티벨(tea bell), 하인과 집사를 호출하던 화려한 유럽 탁상종, 절제된 인체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도자기 인물종, 한 나라의 상징적 인물과 종교적 내용을 조각한 동종, 유명 도자기와 유리 공방들이 명예를 걸고 만든 예술적인 종,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기념종, 전화기, 뮤직박스, 자명종 등 다양한 생활용품들도 등장했다.
종으로 살펴본 세계사
종을 주조하는 장인들은 인류의 역사와 이상을 당대의 진보된 기술과 예술 사조를 활용해 종에 표현했다. 19세기 독일은 동물 모양에 태엽을 감아 소리를 내는 탁상종을 주로 만들었는데, 정부에 공업디자인(D.R.G.M.) 등록을 해 기술과 디자인을 보호했다. 같은 시기 프랑스는 인물 모양 탁상종이 유통되었다. 소설 주인공, 그리스 전사, 도자기와 은의 나라로 동경했던 상상 속 중국인들 등 다양한 인물을 모델로 했다.
우리나라는 1900년대 초반 선교사들이 교육기관을 열며 외부에서 막대로 쳐 소리를 내는 전통 종과는 다르게 추가 종체를 쳐서 소리를 내는 종이 도입되었다. 시계가 귀했던 시절,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역할이었다. ‘made in korea’ 도자기종에는 60~70년대 수출 역군들의 피눈물이 스며들어 있는데, 해방과 이어진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역경을 저가의 인력 집약형 도자기종과 플라스틱 장난감을 만들어 수출하며 극복했다.
책에서는 가공을 최소화한 금속 브루탈리즘 예술품, 전쟁터에 널린 금속 조각을 녹이고 부대 문장을 붙여 만든 참호예술품, 세계대전 때 수여된 철십자 훈장을 손잡이로 단 종처럼 시대적 요인에 따라 제작된 특별한 종을 만나볼 수 있다. 교황 선출을 기념하는 주석종과 자선활동으로 감동을 준 스페인의 제니 린드, 여성 참정권 운동을 위해 가열하게 투쟁한 영국의 에멀린 팽크허스트와 제정 러시아의 요승 라스푸틴 인물종 등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종도 소개한다.
『세계의 종 이야기』는 『종소리, 세상을 바꾸다』와 『종소리가 좋다』에 이어 세 번째로 출간된 종 이야기다. 오랜 시간 종을 수집한 저자는 종이 제작된 역사적 맥락에까지 깊게 파고드는 방식으로 수집가를 넘어 전문가의 영역으로 접어들었다. 저자의 안내에 따라 인간의 일생과 세계사가 독특한 방식으로 기록된 종을 보다 보면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게 들려올 것이다.
책 속에서
종은 온 세상에 널리 분포하며, 그곳에는 삶과 문화, 종교 그리고 염원이 스며들어 있다. 나는 종소리는 절대 권위와 함께 평화, 사랑 그리고 소통의 소리라 생각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는 ‘소통’이라 믿는다.
- 머리말
중세 유럽 성당의 공통적 특징은 높이 솟은 종탑인데, 성당의 종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기도 시간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만큼 종탑은 높았고 종의 크기도 점차 커졌다. 독일 쾰른성당의 종탑은 157.4m나 되었고 프랑스 노트르담 성당의 종 한 개는 500kg이나 되었다. 동양종은 밖에서 때리나 서양종은 잡아당기는 힘으로 무거운 종과 종에 달린 쇠막대(shaft)를 흔들어 울려야 하기에 힘이 많이 들고, 횟수와 리듬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다. 온 힘을 다해 종을 흔들던 노트르담의 꼽추 콰지모도를 생각해 보면 된다.
이를 위해 종지기들은 많은 연습을 해야 했으나, 큰 소리가 나는 종을 아무 때나 칠 수는 없기에 추를 떼어낸 종을 치는 연습을 했다. 이 소리가 나지 않는 연습용 종을 벙어리종(dumbbell)이라 했다.
-p. 78, ‘아령’ 중에서
가고일 탁상종은 코코넛 열매껍질을 자르고 내부를 파내어 태엽을 장치해 스위치를 누르면 감아둔 태엽이 풀리며 소리가 나는 탁상용품이다. 헤헤 웃는 괴물의 혓바닥을 누르면 따르릉 소리가 난다. 몸체는 무서운 가고일 얼굴이나 전혀 무서워 보이지 않는 해학적인 황동 조각이다.
2015년경 미국 플로리다에서 오랫동안 영업을 하던 ‘세상에 이런 일이’란 사립 박물관이 문을 닫으며 소장품을 판매하기에 경매에 참가하여 구입했다. 이 박물관에서는 오랫동안 세상에 이런 탁상종도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이 귀중한 시간을 소비하는 사소한 잡동사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나는 이런 잡스러운 생활용품에도 최고의 정성을 쏟아부었던 장인정신과 이를 용납한 그 사회의 쓸데없는 저력을 높이 평가한다.
세상은 넓고 사람들을 즐겁게 놀라게 하는 일도 많다.
-p. 136, ‘웃는 얼굴의 괴물 가고일’ 중에서
고깔 모자를 쓴 남성 모양 도자기 종은 데시모네 공방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20세기 중반, 1964년에 제작되었다. 입체파 화풍이 유행하던 시절 데시모네 도자기 그림의 독특한 패턴을 잘 보여주는 종이다. 나는 데시모네 공방의 도자기들이 풍기는 은은한 멋을 사랑한다.
1991년 그가 사망한 뒤에는 딸이 중심이 된 가족 공방으로 유지되었으나 2008년 문을 닫았다. 이후 대량의 상업적 도자기 판매는 하지 않고, 딸이 소수의 작품을 제한적으로 만들고 있다.
생활용품에도 멋과 애교를 넣던 그 남부 이탈리아식 여유로움은 실용화의 큰 물결에 밀리며 사라졌다. 사라져 간 그 무엇을 살피는 감정은 그리움과 아쉬움이다.
-p. 160, ‘입체파를 좋아했던 데시모네 도자기’ 중에서
1900년경 독일에서 제작된 뮌헨의 10월 맥주 축제(Oktoberfest)에서 가득 찬 생맥주 4잔을 나르는 바이에른 전통 의상(Dirndl)의 여성 인물종을 발견했다. 크기 22cm의 경화 석고(gypsum)로 만든 크고 귀한 종이다. 수년 전 경매에서 이걸 발견하고 구입하려고 노력했으나, 높은 가격을 지른 사람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번 경매의 판매자 설명글은 수집가들이 무슨 물건인지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었고, 시작 가격이 20달러였다. 미국 보스턴의 판매자는 이걸 단순한 도자기 인형이라 썼지만 나는 그림을 보고 이 제품의 가치를 바로 알아봤다. 결국 일주일을 숨죽여 관찰하다가 마지막에 들어가서 그때 300달러에도 사지 못한 걸 시작가 20달러에 횡재한 것이다. 판매자는 야드 세일에서 구입한 것이라 만들어진 시기도, 종에 새겨진 글자의 의미도 몰랐고 그냥 도자기 인형이라 생각했다. 만약 1900년 독일 바바리안 여인 인형종이라 올렸으면 수집가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을 것이다.
-p. 170, ‘뮌헨 옥토버페스트의 메이드’ 중에서
영어로 Daffy는 ‘어리석은’ ‘모자란’이란 뜻인데, 이들에게는 Daffy Bell이란 이름이 붙어있다. 다양한 모습의 ‘모지리 아저씨, 아주머니, 천사, 소녀, 루돌프 사슴’까지 다양하다.
이들을 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해맑아지지 않을까? 전후 우울함이 팽배했던 그 시절에 코믹한 ‘모지리(Daffy)’들이 내는 종소리는 미국인들에 큰 위로를 주었기에, 서로에게 아름다웠던 그 시절을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것이다.
나도 왠지 나보다 IQ가 낮고 사회에 적응도 못할 것 같아 만만하고, 1946~1971년에 탄생하여 같은 베이비부머 세대이기도 한 ‘바보(Daffy)’들을 매우 사랑한다. 빡빡하고 적대적인 이 시대에 위로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모습이다.
-p. 224, ‘나의 사랑스러운 못난이’ 중에서
오컬트 영화 〈검은 사제들〉(2015)과 〈검은 수녀들〉(2025)의 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금속종을 협찬하였다. 두 오컬트 영화의 주연인 강동원 김윤석 송혜교 배우의 구마의식 장면에서 강렬한 종소리로 마귀를 쫓았다.
1900년대 초 영국 엘킹턴 은회사에서 제작한 ‘복음전도자(Evangelist)의 종’이라 불리는 15cm 크기의 아름다운 은도금 기독교 제례종이다. 이탈리아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이 밤길을 걸을 때 이 종의 소리로 악령이 다가오는 것을 막았다고 해서 ‘프란체스코 종’이라고도 한다. 종에는 라틴어로 마르코, 마태, 루카, 요한 이름과 이들의 상징 동물이 새겨져 있다. 이 영화의 주제와 잘 어울릴 것 같아 구마의식 소품을 찾는 제작진에게 추천했다.
-p. 278, ‘복음전도자의 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