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한상호 시인의 짧은 시: 최소의 언어로 울리는 최대의 울림
한상호 시인의 시는 대체로 짧다. 그러나 그 짧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남의 기업을 운영하던 치열한 경영인의 삶을 뒤로하고 환갑에 등단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시인은, 세파를 견뎌낸 특유의 정갈하고 깊은 시선으로 세상을 관조한다. 그의 시는 머뭇거림 없이 정곡을 찌르고, 혼잣말처럼 툭 던진 몇 마디 속에 삶과 자연의 거대한 이치를 담아낸다.
우리 옛 시조나 일본의 하이쿠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짧은 시는 쓴다기보다 “깊이 묻혀 있는 유물을 발굴하는 일”에 가깝다. 「나물장수 할머니」, 「야생화」, 「못 다 빈 용서」 같은 작품들은 단 한 줄, 단 몇 구절만으로도 독자의 마음 깊은 곳을 흔들며 잊고 지내던 서정의 감각을 깨운다. “짧은 나의 시에서 다시 하얀 골수를 뽑더니 붓에 묻혔다. 그가 창조한 소리글자의 유정함을 시와 함께 독자와 나누고 싶다.”- 시인의 말 중에서
지안 캘리그라퍼의 붓짓: 문자에 생명을 춤추게 하다
캘리그라퍼 지안 작가는 날마다 두물머리 숲길을 걸으며 용담 연못가 작업실에서 글씨를 쓴다. 나무와 햇살, 바람과 강물의 기운을 품은 그의 글씨는 단순히 정돈된 문자가 아니다. 온 마음을 기울여 쓰고 또 쓰다 보면 어느덧 글씨와 하나 되어 춤을 추기 시작한다는 그의 고백처럼, 그의 필획은 생동하는 하나의 생명체와 같다.
「로즈마리」라는 네 글자에서는 진짜 허브 향기가 하늘거리는 듯하고,
「야생화」에서는 거칠고 강렬한 붓질로 야성의 숨소리를 몰아치며,
「못 다 빈 용서」에서는 유연한 구도 속에 서러운 까슬함을 얹어낸다.
시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조형 언어로 재창조해 내는 그의 작업은 시에 단순한 치장을 입히는 것이 아닌, 시의 영혼을 시각화하는 진정한 예술적 승화다.
“온 마음을 기울여 쓰고 또 쓰다 보면 문득 글씨와 내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할 때가 있다. 그 희열이 나를 밀어가는 힘이 되어준다.”- 글씨 쓴 이의 말 중에서
문자향 서권기와 현대적 문자조형의 완성
발문을 쓴 조호상 시인은 추사 김정희가 강조한 ‘문자향 서권기(文字香書卷氣)’를 언급한다. 글씨나 그림에 학문적 깊이와 고매한 인격, 독창성이 서려 있어야 한다는 이 오래된 가르침은, 이 시집 속 지안 작가의 붓 끝에서 현대적으로 부활한다.
한국 고유의 시서화(詩書畵)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상투적인 치장을 과감히 벗어던진 이 작품집은, 언어적 울림과 시각적 감흥이 동시적으로 다가오는 ‘시각 서정’의 진수를 보여준다. 더는 덧붙일 한 글자의 군말도 없는 단정한 시와, 더 커질 까닭이 없는 작은 글씨가 빚어낸 한 폭의 풍경화는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은 명상의 시간을 제공한다.
“읽는 이의 마음을 단박에 건드리는 짧은 시가 글씨를 만났을 때 그 울림은 배가된다. 시적 울림이 시각 감흥으로 변환되어 그 둘이 동시에 다가올 때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감흥이 된다.”- ‘시, 눈으로 보는 즐거움’ 중에서
5가지 테마로 연결되는 영혼의 여정
본 시집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인간의 슬픔과 용서, 그리움, 자연과 삶에 대한 고찰, 그리고 부모님과 고향을 향한 사모곡까지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담아낸다.
Ⅰ. 너를 앓은 후: 상처와 용서, 내면의 성찰 (못 다 빈 용서, 야생화, 되감기 등)
Ⅱ. 허수아비 외발: 삶의 성찰과 순례의 여정 (근시 2, 하루살이, 고해성사 등)
Ⅲ. 네가 스치기만 해도: 일상과 자연의 섬세한 향기 (로즈마리, 꽃차 만들기, 내공 등)
Ⅳ. 삐딱하니 둥글게: 민초들의 삶과 품 넓은 사랑 (나물장수 할머니, 어미새, 화해 등)
Ⅴ. 그리움 푸드덕푸드덕: 부모님과 고향, 시간의 아늑한 유영 (만추, 춘설, 등)
이 계절, 잊힌 감성을 깨우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
‘꽃이라고 보니 뽑아버릴 풀이 없네’라는 제목처럼, 세상을 따스한 사랑과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어떤 존재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한상호 시인의 정갈한 시와 지안 작가의 생동감 넘치는 캘리그라피는 삭막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멈춤과 숨호흡의 공간을 선물한다.
시집의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독자들은 가슴 한구석이 맑게 정화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시를 애호하는 독자는 물론, 글씨의 멋과 조형미를 사랑하는 미술 애호가, 그리고 소중한 이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오래도록 간직하고픈 소중한 선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