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가난은 있었지만 사람이 있었고,
사람들의 온기로 한 소년은 삶을 배웠다”
『새끼 낳은 숫염소』는 경상남도 거창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난 박종덕 저자가 칠십 평생의 기억을 길어 올린 생활 에세이다. 국민학교 교실의 장작난로와 양철 도시락, 장날의 국화빵과 뻥튀기, 소 등에 울리던 요롱 소리, 삼베를 짜던 베틀과 밀주 단속을 피해 감춰 둔 막걸리 항아리까지. 저자의 기억 속 풍경은 한 개인의 추억을 넘어 가난과 산업화의 시간을 지나온 한 세대의 생활사로 확장된다.
이 책이 오래 머무르는 곳은 ‘가난’ 자체가 아니다. 척박한 모래땅을 일구어 가족을 먹여 살린 아버지, 삼베를 짜고 막걸리를 빚으며 살림을 꾸린 어머니, 장롱 속 귀한 곶감을 손주에게 내어 주던 외할아버지, 어머니날 받은 바늘 세 개에 대한 답례로 날계란 세 알을 선생님께 보내던 어머니까지. 가진 것은 적었지만 서로의 마음과 손길로 삶을 이어 가던 사람들의 온기가 책 곳곳에 배어 있다.
책의 제목이 된 이야기는 이 책의 정서를 가장 잘 보여 준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소년은 사방공사에서 두 달간 일하고 받은 밀가루 다섯 포대 중 일부를 팔아 염소 한 마리를 산다. 새끼를 낳으면 그것을 밑천 삼아 다시 공부할 수 있으리라 꿈꾸었지만, 정성을 다해 키운 염소는 새끼를 낳을 수 없는 숫염소였다.
“숫염소는 새끼를 낳지 못했지만,
나는 그 곁에서 책임과 지혜, 다시 일어서는 마음을 낳았다”
소년에게는 허탈한 실패였지만, 세월이 흐른 뒤 저자는 그 시간을 자신을 키운 삶의 밑거름으로 돌아본다. 뜻대로 되지 않은 경험조차 결국 한 사람을 성장시키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은 유년의 고향 풍경에서 부모와 스승의 사랑, 벗과 형제의 인연, 가족과 손주에 대한 마음으로 이어진다. 국화빵 한 봉지, 참외 한 조각, 곶감 몇 알처럼 소박한 기억들은 같은 시대를 살아온 독자에게 어린 날을 불러내고, 다음 세대에게는 부모와 조부모의 삶을 들여다보게 한다.
책 속에서
그때 나는 참외의 단맛만 기억했지만, 지금은 그 단맛 뒤에 스며 있던 아버지의 땀맛과 짠내를 안다. 푸르스름한 껍질 속에 노란 속살을 품은 개구리참외처럼, 그 밭에는 말없이 익어 가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35쪽)
그렇다. 그 염소는 새끼를 낳을 수 없는 숫염소였다. 그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 사실은 그토록 애지중지 키워 온 내 꿈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여름 내내 배 밑이 불룩해지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이 숫염소의 징표라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혹시 중개꾼이 일부러 속인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스쳤다. 그 순간 염소를 바라보며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그 와중에 먹물을 들인 흑염소는 아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 염소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받아들였다. 그것이 내 삶의 일부라고. 꿈은 무너졌지만, 삶은 또 다른 길을 가르쳐 주었다. 숫염소는 그렇게, 내 인생의 첫 스승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때 염소를 산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한걸음 앞으로 옮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02쪽)
숫염소는 끝내 새끼를 낳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그보다 더 귀한 ‘새끼’를 내 마음속에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설픈 실패의 경험은 내게 ‘책임감’이라는 새끼를, 좌절의 눈물은 ‘삶의 지혜’라는 새끼를 품게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오늘의 나는 그 시절 염소가 남긴 또 다른 새끼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 기억의 조각들은 오래도록 내 곁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108쪽)
바늘은 세 개였다. 그리고 날계란도 세 개였다.
그것은 귀한 손님이 오셔야 비로소 꺼내 놓던 것이었고, 아버지의 밥상에나 드물게 오르던, 우리 집에서 가장 귀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당신이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으로 스승의 은혜에 정중한 인사를 대신하셨던 것이다.
(142쪽)
선생님은 그 시절의 많은 기록을 꺼내어 들려주셨다. 비가 많이 와 대초리 냇물이 불어나면 우리를 일일이 등에 업고 건너 주시던 일, 분단 이름을 꽃 이름으로 지었던 일, 연못가 글짓기에서 누가 일등을 했는지, 누가 코를 많이 흘렸는지까지 줄줄이 말씀하셨다. 반세기의 세월을 건너 다시 마주한 스승의 기억력 앞에서 우리는 순식간에 희끗한 머리칼을 뒤로한 채 국민학교 5학년 코흘리개 시절로 되돌아갔다. 그 시절 우리가 딛고 건넌 것은 차가운 냇물이 아니라, 제자를 향한 스승님의 든든한 등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