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2003년 1월 7일 바람 부는 인천 포구에서 시작했던 여행의 기록이
2026년 여름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기에, 어떻게든 기록하고자 했다.”
걷고 쓰는 사람, 김남희가 지나온 시절의 문장들
전 세계를 여행하며 삶을 이어온 작가 김남희. 속도와 효율만을 좇는 세상에서 작가는 오직 걷고 쓰는 일로 자신의 삶을 꾸려왔다. 2003년에 시작된 첫 여정 이후 그의 걸음 곁에는 늘 수첩과 펜이 함께했다. 그날 먹은 음식, 하루의 지출 같은 아주 사소한 것부터,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한 시절 기대었던 사람들, 그 사이에 품었던 높고 낮은 감정들까지. 그렇게 수십 권의 일기장에 훼손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글들은 세월을 건너 한 권의 책으로 엮였다. 시간이 흘러 모든 풍경이 지나가도 기록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발 닿는 곳마다 써내려간 문장들, 그 안에는 인생 마디마다 품었던 작가의 삶의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세상을 떠도는 일은 나 자신을 알아가는 일과 같을까. 여행은 낯선 세계를 만나는 일인 동시에 낯선 자신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수십 년간 국경을 넘고 길 위를 떠돌던 작가는 끝내 마주한다. 낡아지고, 희미해지고,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 속에서 끝내 살아내고야 마는 인간의 삶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사랑하고야 마는 자신의 모습을. 이 책은 여행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삶을 사랑하는 법을 알아가는 사람의 기록이기도 하다. 외로움이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을 짊어지고, 변화하는 세월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오를 수 있는 만큼 산에 오르는 것만으로 충분해하는 법을 새롭게 배우며, 나다움을 찾아 그는 오늘도 길 위로 나선다.
“이 치열하고 경쟁적인 세상에서
고양이의 삶은 우리 모두가 꾸는 꿈 같다.
인생의 낮잠 같은 삶이다, 그야말로.”
효율과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신만의 보폭으로 살아가고, 살아내는 일
책장을 넘기다 보면 문장 사이사이에 고양이들이 불쑥 나타난다. 다마스쿠스의 시장 골목에서, 그리스의 오래된 항구에서, 알바니아의 우거진 숲속에서, 세계 곳곳의 자동차와 쓰레기통 위에서. 모든 고양이 사진은 여행가 김남희가 전 세계를 여행하며 직접 촬영한 것이다. 우연한 만남으로 작가의 여행 속도를 늦추고 가던 길을 잊게 하던 고양이들. 사진첩에 유독 고양이 사진이 많았던 작가는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고양이를 '대충' 사랑하는 것만 같은 자신이 왜 고양이에게 끌리는 것인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공간을 장악해버린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애써 장착했던 계획이나 목표 같은 것들이 내 몸에서 훌훌 빠져나간다. 좀 더 내키는 대로 살아도 될 것 같다. 더 게을러져도 될 것 같다. 좀 더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도 괜찮을 것 같다. 있는 힘껏 애쓰지 않아도, 매사에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다. 아, 여기 아름다운 생명이 있구나. 살아서 펄펄 뛰지만 삶에 지치지 않은 존재가 있구나. 아직 지지 않은 존재, 길들여지지 않은 존재를 지켜보는 기쁨이 일렁인다.”
세상의 속도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나른함을 내뿜는 고양이는 매 순간 성실하고자 애쓰는 인간에게 온전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어떤 길 위에서든 기어이 느긋하게 웅크린 고양이들의 경이롭고 아름다운 생명력,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삶의 다정함을 스무 해 넘도록 기록해온 사람. 이 둘이 자연스럽게 닮아 보이는 이유는 자신의 보폭으로 삶을 나아가는 작가의 태도와 한낮의 낮잠 같은 고양이의 모습이 서로를 비추기 때문 아닐까.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아도 24년 동안 자신을 향해 적어온 글과 고양이들을 향한 다정한 시선이 함께 담긴 이 책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소진되어가는 지금의 우리에게 또 다른 위안이 된다. 언제나 길 위에서 우리의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는 고양이들처럼, 이 책이 독자의 삶 한켠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하는 반갑고도 작은 틈이 되기를 바란다.
책 속에서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공간을 장악해버린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애써 장착했던 계획이나 목표 같은 것들이 내 몸에서 훌훌 빠져나간다. 좀 더 내키는 대로 살아도 될 것 같다. 더 게을러져도 될 것 같다. 좀 더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도 괜찮을 것 같다. 있는 힘껏 애쓰지 않아도, 매사에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다. 아, 여기 아름다운 생명이 있구나. 살아서 펄펄 뛰지만 삶에 지지치 않은 존재가 있구나. 아직 지지 않은 존재, 길들여지지 않은 존재를 지켜보는 기쁨이 일렁인다.
-7쪽, <들어가며>
누가 누군가를 안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 누군가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 그건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어쩌면 우리는 여름날 오후의 한 자락 짧은 꿈처럼 그렇게 잠시 스친 모습을 한 사람의 영원으로 간직하는 건 아닐까.
-27쪽, <한 사람의 영원>
마예트가 어제 내게 물었다. 혼자서 여행 다니는 일, 외롭지 않냐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당연히 외롭다고. 외로운 날들이 종종 찾아온다고. 하지만 부부가 함께 살아도 피할 수 없는 외로움이 있지 않냐고, 되물었다. 마예트도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렇다고. 남편이 곁에 있어도 외로운 날들이 있다고. 외로움은 인간인 이상 숙명 같은 짐이라고. 결국 자신의 가장 진실하고 유일한 친구는 자신뿐인 걸까.
-44쪽, <외로움이라는 숙명>
누군가 그랬다. 오후 3시의 시간은 무엇을 하기에도 애매하다고. 하루를 시작하기에도, 하루를 마감하기에도 어정쩡하다고. 나이 마흔의 여행이 그런 게 아닐까. 계속하기에는 지치고, 그만두기에는 아쉽고… 나의 한계에 부딪히는 일들을 연달아 겪고 있다. 누구의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될 것 같지 않다. 지금 나를 격려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인데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든, 미운 나.
-68쪽,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읽는 여행에 관한 글도 좋다. 여행을 떠나 길 위에서 읽는 여행에 관한 글도 좋다. 하지만 가장 좋은 건 막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그때 읽는 여행에 관한 글이다.
내 몸에 아직 마지막 도시의 바람 냄새가 남아 있고, 미처 풀지 못한 짐이 한편에 쌓여 있고, 배낭에는 먼 도시의 이름을 단 비행기 짐표가 붙어 있고, 돌아왔다는 것조차 알리지 않아 전화는 울리지 않고, 내가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닌 어딘가에 존재하는 느낌이 드는, 떠나온 곳과 돌아온 곳 사이에 서 있는 듯한 그런 순간에 읽는 글들.
-115쪽, <여행에 관한 글>
눈을 뜨면 흩어져버릴까, 소리를 내면 달아나버릴까, 움직이면 사라져버릴까 두려워 숨죽인 채 그저 바람을 맞는다. 팔을 벌려 온몸 가득. 사막에 불어오는 바다의 내음을.
소금 사막에 비가 내리면 하늘이 땅으로 내려와 몸을 섞는다던데, 서 있는 자리의 경계도 희미해져 꿈과 현실마저 아련해진다던데, 오래전에 지워진 얼굴들 모조리 살아나 흔든다던데, 나보다 먼저 이곳에 왔던 이들은 무엇을 보고 떠났을까.
-144쪽, <소금 사막에 비가 내리면>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점점 더 나이 든 여자들이 좋아진다. 제 속을 까맣게 태워가며 새끼를 낳아 키워본 경험 때문일까. 그녀들은 타인의 어려움이나 고통에 예민하다. 내가 절박한 눈빛으로 도움을 청하면 언제나 달려드는 여자들. 허망한 욕망에 자신의 영혼을 판 적도 없이 그저 제 새끼의 무탈함만을 빌며 살아왔을 것 같은 그녀들. 나도 그들처럼 너그럽고 순박하게 늙어가고 싶다.
-148쪽, <점점 더 나이 든 여자들이 좋아진다>
오늘의 노을은 어제의 노을과 다르다. 오늘의 오렌지꽃 향내도 어제의 오렌지꽃 향내와 다르다. 매일 달라지는 공기의 흐름을, 대지의 기운을, 바다의 소리를 느낄 수 있어 그저 고맙다. 내 가슴이 아직 메마르지 않아서, 내가 사소하고 작은 것만으로도 위로받을 수 있어서 기쁘다. 이 삶을 견디는 데 내게 재능이 있다면 그런 태도가 아닐까.
-197쪽, <삶을 견디는 재능>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하다 문득 깊은 충만함이 밀려들었다. 눈앞의 나뭇잎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호수에는 쪽배들이 한가롭게 흔들리고 있다. 지난 여행의 기록을 정리하며 커피를 마시는 동안 생각했다. 이렇게 살아가는 한 나는 평생토록 가난하고 외롭겠지만, 이게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삶의 방식이라고, 그걸 부인할 수는 없다고.
-237쪽,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중에서
같은 건물 아래위층에 살기도 했던 우리는 내가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온 후에는 숲을 사이에 두고 살았다. 숲을 건너가면 그녀가 사는 집이 나오던 시절은 얼마나 따스했던지. 가까이 있을 때도 나는 그녀가 그리웠는데 멀리 떠나고 나니 빈자리가 사무쳐서 가끔 숲 너머 그녀와 내가 살았던 동네를 지나갈 때면 하염없이 쓸쓸해지고는 한다.
“이 겨울, 우리 우울과 외로움과 열심히 싸워서 이겨내자.”
그녀에게 말했다. 외로움에 지더라도 맨날 지지는 말자고. 멀리 있는 그녀에게도, 창 너머 어두워진 숲을 바라보며 서 있는 나에게도 이 겨울이 너무 춥지는 않기를.
-320쪽, <맨날 지지는 말자고> 중에서
우리는 오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는 저마다의 운명과 고독을 짊어진 채로. 때로는 패배하고, 때로는 작게 승리하고, 때로는 혼자라서 쓸쓸해하고, 때로는 타인의 온기에 기대어 위로받으며. 그렇게 꿋꿋이 살아가고, 살아내다가 다시 어딘가에서 만나 웃을 수 있게 되기를.
-345쪽, <피할 수 없는 삶의 길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