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이 책은 상하이(上海)에서 벌어진 10년간의 문혁 역사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상하이 문혁은 중국 전체 10년 문혁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으며, 특히 상층 정치 투쟁을 제외한 대중운동에서 문혁의 특징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 주었다. 문혁 대중운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베이징(北京)을 중심으로 한 홍위병(紅衛兵) 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상하이를 중심으로 하는 노동자조반파(造反派) 운동이었다. 홍위병 운동은 1968년의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에 이르러 기본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노동자조반파 운동은 1968년 ‘대연합(大聯合)’ 때 사실상 종료되었다. 그러나 왕훙원(王洪文)이 이끌던 노동자조반파만은 조직 체계를 확립하면서 핵심 세력을 유지하였고, 문혁이 지속된 10년 동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홍위병과 노동자조반파 외에, 상하이에는 다른 성(省)이나 도시에는 없는 독특한 문혁 세력이 존재했다. 그것이 장춘차오(張春橋)와 야오원위안(姚文元)을 핵심으로 하는 공산당 상하이시위 사작조(寫作組)였다. 이들은 상하이 여론을 좌우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 여론에 대해서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상하이 문혁은 중앙 문혁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965년 『해서파관(海瑞罷官)』 비판을 시작으로, 1966년 안팅(安亭) 사건, 1967년 1월 탈권(一月奪權), 1976년 무장 저항 미수 사건에 이르기까지, 상하이 문혁 세력은 마오의 문혁 노선을 위한 돌파구를 마련하며 그의 정치적 구상을 충실히 따랐다.
저자는 이 책의 전체적 서사를 통해 “왜?”라는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지며, 역사적 동기와 논리를 추적하고자 했다. 각 장(章)과 절(節)의 서술에는 모두 이러한 문제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수많은 사건과 역사적 상황이 처음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그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찾고자 하였다. 또한 역사란 개별적 세부 사실들의 축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며, 만약 이러한 세부 요소가 결여된다면 역사는 거대한 블랙홀처럼 공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또한 문혁 참여자의 운동 과정과 그들의 모습을 최대한 재현하고자 했다. 그들 역시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상하이 문혁 연구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단지 안팅(安亭) 사건, 『해방일보(解放日報)』 사건, 캉핑루(康平路) 사건, 1월 탈권 등과 같은 중대한 정치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또 다른 연구 관심사는 노보(老保) 조직, 대연합, 관료제 정비, 변화된 대중 조직, 후기 조반파, 사작조, 제2 무장 등과 같은 다양한 영역에 미쳤다. 이들은 모두 문혁의 중요 구성 요소로 연구되어야 마땅하다. 비록 사료의 한계로 인해 연구를 더욱 심화시키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러한 논의가 실마리가 되어 다른 연구자들의 견해를 이끌어 내고, 이들 영역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나아가, 후속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또한 문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가 역사적 기억을 되새기며, 문혁의 실제 현장을 재현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책 속에서
장춘차오는 여러 차례 시혁위회 부주임을 맡고 있던 쉬징셴에게 “공을 들여 시혁위회의 문건과 결의문 작성을 맡겨 잘 쓰게 하라”고 지시했다. 야오원위안 역시 “문건을 전문적으로 작성할 일부 인력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21쪽)
1967년 4월 1일, ‘시혁위회 전제(專題)사작조’가 공식적으로 성립되었으며, 그 근무지는 룽창루(榮昌路) 60번지였다. 이 장소는 문혁 이전, 시위 정책연구실 판공처가 위치했던 곳이기도 했다. 사작조 조장은 우루이우(吳瑞武), 당소조의 장은 왕사오시(王紹璽)였으며, 구성원으로는 왕즈창, 우루이우, 주융자, 천지더 등 이전 사작반의 핵심 인물들이 포함되었다. 또한 이전 시위 당간(黨刊) 편집실의 샤오무, 재무계통 기관 간부 주후이민(朱惠民), 공업계통 간부 우원후(吳文虎),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서기 지수리(紀樹立) 등도 사작조에 참여하였다. 이후에도 적지 않은 인원이 지속적으로 추가되었다. 주융자는 “출신 성분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사작조에 참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푸단대학의 비판을 받았고, 그로 인해 단순 조원 신분에 머물렀다. 우루이우는 주융자와 같은 시기 푸단대학 역사과 강사였고 문혁 이전에 시위사작반 역사조에서 활동했다. 그는 신중한 성격에 조심스럽게 일을 처리했으며, 왕즈창(王知常)처럼 요란하게 떠들지도, 주융자처럼 큰 포부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전제사작조는 실질적으로 시혁위회의 문서 작성과 정책 연구 기능을 수행하였다. (21-22쪽)
“자본주의 길을 걷는 당권파를 타도하고, 자산계급 반동 학술 권위를 비판하며, 자산계급과 모든 수탈계급의 의식 형태를 비판해야 한다. 교육을 개혁하고, 문예를 개혁하며, 사회주의 경제 기초에 적응되지 않는 모든 상층 건축물을 개혁해야 한다.” (35쪽)
“노동자, 청년, 여성 가운데 성장 가능성이 높은 인재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체계적으로 육성해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을 철저히 실행함으로써 무산계급 독재를 더욱 굳건히 해야 할 것입니다.” (417쪽)
마오는 여러 차례 장칭, 장춘차오, 왕훙원 그리고 야오원위안을 묶어 ‘사인방’, ‘상하이방’이라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1974년 10월 18일, 왕훙원은 장칭의 뜻에 따라 창사에 있던 마오를 찾아 덩샤오핑이 국무원 제1부총리가 되는 것에 반대하였다. 마오는 이때 정치적 욕망이 너무 강해 여기저기에 적을 만들고 있던 장칭에 대해 불만을 지녔고, 부주석이면서 항상 장칭의 꽁무니만 따라다니던 왕훙원에 대해 실망하였다. (445쪽)
공총사가 대중조직에서 노동조합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제도화 작업 대부분은 예창밍의 손을 거쳤다. 그는 총부 각 조(組)의 활동 규정을 제정했고, 각 조의 직권 범위를 정비했으며, 제4기와 제5기 상하이 공대회 준비 작업을 주도했다. 동시에 그는 상하이시총공회 부주임으로서 일상 활동을 총괄하며, 공총사가 상하이 노동자조반파를 결집하는 중심이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482쪽)
그러나 문혁 후기로 갈수록 그는 노동조합이 항상 “큰일에만 매달려” 노동운동을 전개할 수는 없다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 오히려 노동자들과 밀접한 이해 관계가 있는 실질적인 일에 주력해야 한다는 자각이 점점 뚜렷해졌다. 그는 훗날 회고하기를, 공총사가 공대회로 전환된 이후 노동조합 활동에 큰 공백이 생겼으며, 정치운동이 벌어질 때마다 각급 노동조합은 “대중을 동원해 적극적으로 호응했지만”, 정작 노동조합 본연의 일상 활동은 거의 수행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4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