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시인의 말]
되살아난 이후
남은 일은
또 죽을 준비
이어지지 않는 것들이
켜켜이
거의
나
책 속으로
평균율 클라비어 연습
0. 프렐류드
오늘
브런치 메뉴는
반숙 달걀
망고 향 토마토
루비 레드 자몽 샐러드
솔티 캐러멜 밀크티
식탁 한가운데
라일락 장미 한 송이가
비스듬히 서 있다
이름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이미 입안에 들어와 있다
Ⅰ. 제1변주-발음
소리 없이 방향을 바꾸는 동안
내 핏속에도
몇 개의 시간이 겹쳐 흐르고
몇 개의 언어가
서로의 발음을 훔친다
혀는 하나인데
발음은 여러 개다
이름은 발음보다 늦게 도착한다
나는 한 번도
같은 방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
Ⅱ. 제2변주-기원
네안데르탈인의 뼈
사하라의 먼지
잃어버린 음절 하나가
체온을 만든다
몸은 뒤섞여 있고
출처는 계속 늦게 도착한다
이름은 탄생보다 늦게 도착한다
나는 이미 여러 번 태어났지만
어느 탄생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
Ⅲ. 제3변주-시스템
업데이트, 업데이트
다른 이름으로 저장, 저장
이름은 계속 바뀌고
파일은 덮어 씌워진다
이름은 저장보다 늦게 도착한다
자장자장 우리 아기 잘도 잔다
아기를 재우다 나도 잠들고
재부팅 이후에도
같은 나는 실행되지 않는다
Ⅳ. 제4변주-과육
토마토처럼 터졌다가
자몽처럼 찡그리고
캐러멜처럼 들러붙고
과육은 국경 없이 익는데
맛은 계속 바뀌고
이름은 맛보다 늦게 도착한다
같은 입인데
같은 맛을 기억하지 못한다
Ⅴ. 제5변주-조성
모든 조성을 허락받은 대신
어느 조성에도 머물지 못했다
나는 어디서든 연주되지만
어디에서도 완성되지 않는다
이름은 끝내 늦게 도착한다
Ⅵ. 코다
평균으로 맞춰진 음들은
서로를 닮지 않기 위해
더 정확해진다
더 정확하게 어긋난다 ·
화이트닝
시상식의 스포트라이트 때문일까
테네리페 섬의 오후 두 시를 활보해서일까, 어쩜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분만실 조명 때문일지도, 혹은
신부 대기실에 터지던 카메라의 섬광 때문일지도
빛에 그을린 얼굴이 바닥에 굴러다닌다
두꺼운 빛의 붓질에 찢어지는 얼굴
얼굴을 끄고 싶어요
땅에 얼굴을 심는다
흙이 멱살을 꽉!
푹! 생각이 박히는 것
가지 치는 팔다리를 묶는 일
허공에 발길질하며 발자국을 낭비하는 일
낭비할수록 쌓이는 예금은 이미 가입되었다
생각이 뿌리내리고
뿌리의 잔털이 어둠을 더듬을 때마다
뿌리의 속살이 환해진다
자라지 못한 것은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덜 어두웠기 때문이죠
여기는 신선한 부식물이 가득한 뷔페
머리가 자란다, 익는다
무슨 나무인지
얼마나 자랐는지
얼마나 자라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멱살 쥔 흙의 손아귀 힘이 빠진다
키워 주신 흙을
툭, 툭
어둠에 그을린 하얀 얼굴
커튼을 열고 창문을 바라본다
창이었다가
문이었다가 ·
크리넥스
일부를 보여 주었다
전부를 보여 주기 위해
쓰러진 모습은
시작하기 좋았다
노르웨이의 숲을 뽑아
부대끼던 가지들의 소리를 톱질하고
모양과 향이 상자 안에서
평범과 인내를 저지르며
가지런해지는데
고슴도치가 와다다 달려와서
크리넥스를 뜯어 먹는다
내 손도 뜯어 먹는다
손끝이 온몸을 흔드는데
윤기 나는 가시를
온몸에 박고 당신은
나를 향해 웃는다
너의 웃음에 대해
나의 손끝에 대해
전부를 말하지 않았다
하나도 말하지 않기 위해 ·
--- 본문 중에서
추천평
이것은 인어의 시이다. 안데르센의 인어는 사랑을 위해 말을 잃은 자의 알레고리이지만, 그 알레고리는 차라리 사랑을 위해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완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동화에서 죽음 대신 삶을 넣으면 역설적이게도 ‘살아 있는 죽음’이 만들어진다. 안정희의 이 시집은 살아남은 인어 공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삶은 “행복해야 할 의무만” 남은 “천국에 갇”혀 “행복을 견”뎌야 하는 삶이다(?독재?). “보호와 위험은 같은 얼굴”인 삶을 사는 자에게 자신의 본성인 ‘나’는 현실의 자신을 괴롭히는 힘이 되어 버린다(?자음 N?). “나에게 잡힌 채 버둥대”는 벌레의 이미지나(?사하라의 호르몬?) 끊임없이 떨어지는 힘이나 튕겨 오르는 힘 어느 쪽이나 다 목숨을 건 모험일 수밖에 없는 번지점프의 이미지는 모두 지독한 자기부정이자 동시에 진정한 “나를 향한 향수” 사이에서 분열되는 삶을 보여 준다(?번지점프?). 그래서 수술대 위의 경험은 선상 처리되는 다랑어에게 기투되고(?선상 처리?), 보통의 생명체라면 견딜 수 없는 수압과 온도를 견디는 마리아나 꼼치에게 자기 동일시하고, 그 고통이 자신을 괴롭히는 힘이면서 동시에 “그녀를 지탱하는” 힘이 되는 아이러니를 발견한다(?마리아나?). 그러므로 어쩌면 모든 동화는 잔혹/동화인지도 모른다. 잔혹함이 빗금 쳐진 이 동화의 표면에 세련되고 화려한 소비의 신화가 그려져 있고, 아마존과 유럽의 어느 곳을 여행하더라도 그 모든 소비와 여행에는 또 다른 잔혹-빗금이 쳐져 있으며 이 빗금은 심지어 전지구적이기까지 하다. “가장 밝은 빛의 공포”가 이렇게 폭로된다(?전기조명종합백화점?). 하지만 우리는 사랑을 대가로 언어를 잃었던 인어가 견디는 ‘죽은 삶’을 통해 반대로 그가 잃었던 ‘자기’를 발견한다. 이 인어는 시시각각 세계 밖으로 밀려나는 자기를 살아 내면서 매번 가장 먼저 자기에 도달한다.
- 이현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