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굳은 말들을 두드려 편다.
내가 저지른 삐딱의 순간들을 달래기 위해.
주고받을 그 무엇으로 삐걱대기 위해.
2026년 여름
박래은
책 속으로
사람들은 손에 손잡고 마을 풍경을 기억하자고 말했다
나는 눈에 천을 가리고 흰빛을 차단했다 마을을 벗어나기로 했다 잿빛 나뭇가지를 잘랐다 다리를 건넜다 마을 출입구의 표지석을 지나 물소리가 약해지자 나는 생각했다 (어디로 가야 할까) 광장이 있을 거야 새가 날고 있을 거야 나무는 푸르고 사람들이 웃고 떠들 거야, 가자 가자 또 다른 세상으로
(중략)
도시는 눈부셨지만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을 잊기 시작했다
여러 겹의 슬픔을 쌓아 놓은 흰빛의 세상
흰쌀밥을 꼭꼭 씹어도 살이 찌지 않았다
---「상자를 보면 마을을 만들고 싶은 이유」중에서
우리들은 밤의 숲길로 들어간다
당신이 보리수 나뭇가지를 들어 줄 때
외가에도 보리수나무가 있었다고 말하려 할 때
당신은 저만치 앞서 걷고
공원이 끝나는 곳에 뜻밖의 피아노
배워 본 적 없는 피아노를 당신이 두드릴 때
불협화음과 위로가 되는 밤이라고
누군가가 박수 칠 때
우리들은 모두
지나가는 한때일 뿐,
고난은 곧 끝날 거라고 믿음의 신호를 교환한다
---「밤의 공원」중에서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은
위생사의 손길을
너무 큰 낙관은 아니라며
그녀는 덤덤하게 말했지
링거를 달고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이
정원을 두텁게 채색하는 사이
봄이 스치더니
맑은 하늘빛으로 여인이 말했다
헝가리에 갈 거예요
프러포즈하기 좋은 해그늘을 향해
미래엔 헝가리에 갈 거예요
봄꽃 떨어진 의자는 나무 그늘만큼
앉아 있기 좋았는데
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미래를 알려주는 누군가가 오는 것을
알면서도
예정된 행사처럼 아픔을 기다릴 수 없어
나는
속으로 울고 있었지
---「미래엔 헝가리에 갈 거예요」중에서
추천평
‘박래은’, 두루두루 넓은 미래의 은빛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미래엔 헝가리에 갈 거예요”라는 첫 시집 제목과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는 “조금 더 빠르거나/조금 더 느리거나”, “걷는 사람”이자 “산책”자다. 속해 있는 동시에 관찰하는 자, 그것은 산책자의 운명이다. 미래를 향해 과거와 현재를 걷고 걷는 그는 “이야기 파편들”로 환등상(幻燈像, phantasmagoria)을 펼쳐 보인다. 그래서일까, 핍진성과 환상성, 다채로운 화법과 형식으로 구축된 그의 시의 스펙트럼은 박래은이라는 이름만큼이나 넓고 또 매혹적이다. 그가 가려는 미래 또한 “포도와 씨앗 사이에 고인다는데/포도에 씨가 없”는 현재와 “새가 울수록 비린 맛이 감”도는 과거가 혼재해 있다. ‘물(소리)에 빠진 가족들’에서부터 2025년 1월의 “용산 관저 앞”까지, “북반구의 공원”의 산책에서부터 로봇-휴먼이 쏟아져 나오는 “dream factory”까지 이어진 미래다. 그런 미래가 집약된 헝가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무장소성을 띤다. 아팠고 아픈 “몸과 몸이 자꾸 가까워”지는 “먼 곳이라서 눈부신 환상”을 꿈꾸며 그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나는 바닥에 앉아/조각난 소식들을 맞춰 봅니다/가까운 미래가 도착합니다”. 두 귀가 솔깃하다.
- 정끝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