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부활하는 삶
이은송 시인에게 ‘겨울’이라는 시간은 동시에 ‘실존의 시간’이기도 하다. 즉 겨울을 삶의 시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은송 시인에게 겨울은 삶이 부활하는 시간이다. 시인이 “우리, 더 추운 곳으로 가자//겨울같이 시리게 우리들의 사상이 명료해지기를”(「멜랑꼴리학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숨김없이 드러난다. 한편으로 「노숙」이라는 시에서는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저 바람”이라고 하거니와 여기서 ‘바람’은 겨울과는 무관해 보이지만 이미 마련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일종의 자기 수련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정신적 태도를 나타내는 은유다. 그리고 이런 은유는 “단풍나무”(「단풍나무」)나 “낡은 옷”(「낡은 옷에 대한)」 등으로 변주된다.
이번 시집에 드러난 이은송 시인의 시 세계가 관념적인 정신주의가 아님을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것은 시집 3부에 들어서다. 돌연(?) 생명의 정취가 맴돌면서 시가 날개를 펼친 듯한 느낌을 충분히 준다.
밤새 몸을 뒤척이는 밤//나는 깊은 겨울 숲에 들어가 벌목하는 사내가 된다//겨울나무를 숲에 들어가 도끼로 쿵쿵 치는 사내는//무엇인가는 각오한다는 것인데//숲속 호숫가, 얼음물의 가장자리처럼//각오하는 신념으로//쿵쿵,//산이 울리게//나를 두드리는 밤
_「성소」 부분
또는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그것은 명확해 보인다.
내 심장에//꽃피려나 보다//어젯밤부터 심장에서 묵은 흙이 바실바실 떨어져 내려//빗자루로 떨어진 흙을 쓸어내다가//차라리//어서 오너라 봄비야 님처럼 오너라//내 심장에 생강나무꽃으로 피어라
_「봄」 부분
드디어 강이 주는 삶의 공포를 극복한 것처럼 보인다. “겨울강의 뒷모습은 얼마나 푸르렀나”(「스무 살 무렵」). 이 시집은 삶이 부활하는 과정을 기록한 시집우로 읽어야 마땅하다.
책 속으로
땅과 하늘의 깊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을 때
겨울이 와요
보아요, 저 눈부신 허공을
겨울을 빌미로 나는 하루 종일 허공을 응시할 수 있어요
하루 종일 허공을 보다가 잠에 들고 다시 아침을 맞이하고
산이여, 바다여, 파도여
부질없이 내던져진 우리들의 이야기를 받아내느라
저기 산이 되고 바다가 되고 파도가 되었다고
나는 죽지 않고 또 살아나 억만년의 허공을 만나고 있어요
행운의 날들이라고 기록하려고 해요
다시 그대를 만나기를 기약할 때쯤
허공에는 눈이 내리고
오오 아름다워라
저 허공의 깊이는 얼마나 깊은가요
저 허공의 넓이는 얼마나 넓은가요
---「허공의 눈부심」중에서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소리 없이 살고 싶어 가끔 목이 메어요
내 목소리가 너무 크고
내 발자국 소리가 너무 커서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위로하려
겨울밤 조용한 골목길을 걷기도 하는데
모든 발자국 소리를 다 삼키는 겨울밤은
그래서 좋아요
소리가 점점 사라지는 어둔 적막의 기개에
너도 나도 조용해져서
소리들이 잦아들면
하늘의 별들을 올려보아도 좋아요
소리들이 사라지는 즈음이면 또 별이 뜬다는 것인데
그때 난 골목길에서 별을 보다가
언뜻 휘청이는 가로수 잎들의 소리를 듣다가
내가 사라지는 것을 듣기도 해요
그렇게 조용해지는 겨울밤은 나를 싣고
멀리멀리 떠나기도 하는데
그럴 때 나는, 눈송이 밤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자가 되어
소리들조차 아주 잊기도 해요
---「소리 없이 내리는 눈」중에서
겨울이 오면 왜 차가운 바람 속을 달리고 싶은지
오늘 밤도 한밤중인데 밖으로 나가 달리고 싶어졌다
어느 날은 아침보다 더 먼저 달리고 싶어지기도 했다
겨울 속을 달리다 보면 코끝에 스치는 차가움
달리다가 올려다보는 깜깜한 하늘
겨울의 별
그것들은 호수처럼 차가워서 더욱 빛나기에
차가움을 좋아하는 것은
무딘 나의 경계를 얼음장처럼 깨우쳐 주고 싶은 마음이라서
달리다 보면 모든 경계가 사라지고 혼자 웃는 밤을
오롯하게 사랑할 수 있어서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지니
나조차 혼자 웃는 밤
좋은 밤, 환한 밤, 빛나는 밤
---「겨울 달리기」중에서
재봉틀을 돌리던 모습이
내 꿈속에서만 존재하다니요
믿기지 않아요
나를 낳아, 언니로, 누이로 신념처럼 세워놓고
아픈 당신을 내 심장 깊숙한 곳에 각인시켜놓고서
어디로 갔나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당신
빈방만이 허공으로 남아 있어
난 맨발로 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잡을 것 없는 바닥을 더듬더듬
잡을 것 없는 허공을 더듬더듬
잡을 것 없어 빈손으로
허공 한 줌을, 햇살로 모아
당신에게 공양물로 놓아요
---「당신의 빈방」중에서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저 바람이다
저 풀들이다
저 나무들이다
저 하늘이다
비 온 뒤 풀들 사이로 걷다가
풀들의 노숙
잎들의 노숙
---「노숙」중에서
손금처럼 줄기를 따라 짚어보니
한 잎에서, 다른 한 잎으로 자신을 떠난 넝쿨
한 잎에서, 한 잎으로 온 한 잎들이
알을 낳듯이 무수한 너를 낳고
태어난 그 한 잎이 자라 또 한 잎을 낳으니
세상은 온통 너와 나의 세계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온몸을 비틀며 애를 쓰며 태어나고
살아가는,
온통 한 잎들이여
---「한 잎이 한 잎을 낳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