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본론에서 분명해지겠지만, 초기 기독론과 삼위일체의 기원에 관한 연구는 역사학자로서 내가 제임스 D. G. 던(James D. G. Dunn)이나 바트 어만(Bart Ehrman) 같은 전문가들의 견해를 거부하도록 이끌었다. 이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가 부활할 때 “하나님의 아들”(본래는 단지 메시아적 칭호였을 뿐임)로 “입양”되었을 뿐 선재하지 않았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영원 전부터 선재하고 시간 이전에 나신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구별된 신적 위격이자 영원 전에 나신 아들로 여겼을 가능성이 더욱 높다고 결론짓는다. 비록 훨씬 더 추측에 가깝기는 하지만, 어쩌면 역사적 예수 자신에게서부터 이러한 인식이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나는 신약성경의 여러 결정적인 구절에서 초기 교회가 전개한 위격론적 독해 전략의 미묘한 차이를 학계가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양자론적 가설이 번창해 왔다고 믿는다.…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합의에 전통적으로 기술된 삼위일체 교의를 더욱 진심으로 긍정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한 분 하나님께서 세 구별되는 위격으로 실재하신다는(subsists) 것이다. 원인이 없으신(uncaused) 성부, 영원히 나신(eternallybegotten) 성자, 그리고 보내지신(sent-forth) 성령으로 말이다.
---「서론」중에서
삼위일체 교리의 발전적 성장을 서술하는 네 번째 접근 방식은 바로 “위격론적 주해의 연속으로서의 삼위일체론”인데, 이것이 바로 내가 소수만 알고 있으며 여전히 온전한 탐사와 인양을 기다리고 있는 침몰한 선박의 화물에 비유했던 접근 방식이다. 물론 간헐적인 예외가 존재하기는 하지만(대체로 교부 시대 학자들의 경우인데 이에 관해서는 조금 뒤에 다룰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에 관해 이렇게 접근하는 방식은 신약성경 및 초기 기독교 학계에 의해 거의 전적으로 무시되어 왔다. 나는 본 연구가 이런 접근 방식을 인양하고 조명하는 일에 아주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기를 바라는데, 초기 교회에서 사용된 이런 해석 전략에 주목함으로써 “신적 존재 내부의 관계”(intra-divine relationships)에 관해 얼마나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과업이다. 그런 만큼 이 연구는 전반적으로 다른 학자들이 유대교 유일신 사상, 초기 기독론, 삼위일체의 발흥에 관해 다룬 수많은 훌륭하고 정교하며 유익한 연구들과 동일한 영역을 다루거나 그것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대체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을 보완하고, 그 연구들이 함의하는 바를 도출해 내며, 때로는 일부 수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따라서 본 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나는 “위격론적 주해의 연속으로서의 삼위일체론”이라는 주제를 어느 정도 상세히 서술하고자 한다. 이는 허타도 등의 접근 방식을 크게 보완하는 접근 방식이면서도 삼위일체 및 기독론의 발전에 관한 학술적 서사에 특정한 수정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제1장. 해석과 탄생: 삼위일체의 태동」중에서
테오드라마적 성경 해석은 초기 기독교 성경 독자들이 상상했던 하나님의 위격들(divine persons)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을 제공하며, 이 개별적인 장면들이 하나로 이어지면 내적인 신적 생명(interior divine life)의 파노라마를 형성한다. 우리가 검토할 첫 번째 장면의 모음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태초의 시간에 속하는 것으로 해석했던 대화들이다. 때때로 이 대화들은 요컨대 시간 이전의 시간, 다시 말해 별과 해와 달이 제자리에 놓이기 전으로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내가 입증하고자 하는 바와 같이, 만약 삼위일체 교리가 초기 교회가 유대교 경전을 해석하는 특정한 “위격-중심적”(person-centered) 방식을 통해 필연적으로 생겨난 것이 사실이라면, 예수 자신이 이러한 관행에 반복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을 발견하더라도 우리는 아마 놀라지 않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의 전체적인 논지가 그런 가정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단순히 복음서 저자들의 묘사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 자신이 실제로 성경에 대한 테오드라마적 해석에 동참했다고 (검증 가능한 가설로서)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제2장.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대화」중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가 위대한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과 피를 단번에 제물로 드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구약 시대의 희생제사 제도를 그것의 합당한 텔로스(telos), 다시 말해 그것을 성취하는 완성이자 시간적 종결로 이끌어오셨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러한 결론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성육신에 관하여 성자와 성부 사이의 대화와 관련된 위격-중심적 성경 해석을 통해 도달한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10:5)는 “그러므로 주[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Dio eiserchomenos eis ton kosmon legei)라고 선언하며 시편 39:7-9(LXX = 40:6-8 MT)의 인용을 소개한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시제 조합을 통해 우리를 위해 이 구약성경 담화에 담긴 테오드라마의 시간적 배경을 고정해 준다.
히브리서 저자에게 있어 비록 이 발화의 예언적 배경은 다윗 시대였지만 성령은 시간에 얽매이지 않으며, 예언자가 다양한 역할을 맡을 때 다윗을 통해 발화된 이 신적 담화를 위해 성령이 전혀 다른 배경을 설정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텍스트에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배역)으로부터 말씀하시는 것으로 인식되며, 예수가 세상에 들어오셨을 때, 즉 성육신의 순간에 그리스도는 성부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주께서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시 39:7[LXX]의 변형된 형태를 인용한 히 10:5)
---「제3장. 테오드라마의 전략들: 아들의 사명」중에서
버림받음의 절규인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고찰하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참으로 죽음에 이르도록 버려지셨다(죽도록 허락되셨다)는 점을 이해했지만, 이 “버림받음”을 예수와 성부 하나님 사이의 진정한 분리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런 주장은 초기 문헌에 실질적인 근거가 없는 허무맹랑한 학문적 구성일 뿐이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가 성령에 의해 저술되고 미리 정해진 테오드라마의 대본을 체현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초기 교회의 관점에서 시편 저자는 미래 그리스도의 배역 안에서 말씀하시는 중이었고, 예수가 참된 그리스도로 무대에 등장하셨을 때 그는 이 테오드라마의 비전을 체화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또 기꺼이 그렇게 하셨다. 참으로 성자가 그 대본의 대사들을 소리 내어 부르짖으셨을 때 그 발언들은 그의 참된 감정을 완벽하게 포착해 냈다. 완전히 인간이신 아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버림받으시는 과정에 있었고, 어쩌면 성부가 자신을 정말로 (존재론적으로) 버리셨다고 스스로 느끼기까지 하셨기 때문이다. 비록 성자에게는 실제 현실이 그렇지 않으며, 우리가 다음 장에서 보게 되듯이 성부가 궁극적으로 그의 고난 저편에서 그를 구출하시고 신원(vindicate)하실 것이라고 확신하셨음에도 말이다.
---「제4장. 십자가 중심의 대화」중에서
결과적으로 히브리서 저자에 따르면 첫 창조는 결국 아들의 의도적인 선택을 통해 최종적인 폐기에 이르게 될 것이다. “겉옷처럼 그것들을 둘러말 것이요”, 즉 아들은 마치 알 수 없는 미래의 용도를 위해 수리 불가능한 상태로 보관하려고 둘러마는 것처럼 그 낡아빠진 첫 창조를 치워버리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이 “알 수 없는 미래의 용도”는 사실 놀랍고 새로운 옷을 재단하는 일이었다. 첫 창조 전체는 한때 사랑받았지만 해져버린 운동복과 같아서, 그중 가장 좋은 가닥들만 남겨져서 생동감 넘치는 새로운 정장으로 직조될 것이다. 요컨대 첫 창조의 작업물들은 근본적인 방식에서 “변할 것이다.” 부패한 재료는 버려지겠지만, 거르기가 완료된 후에는 참으로 썩지 아니할 재료가 다시 새로운 직물로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첫 창조세계와 함께 이 과정에서 변형되지 않으실 것인데, 왜냐하면 훗날 아리우스(Arius)의 주장과는 달리, 그는 피조물이 아니라 아들이시기 때문이다(히 1:5). 그는 옷이 아니라 재단사이시며, 아버지가 그를 통해 우주 창조를 대행하신 신적 위격이시다(히 1:3)
---「제6장. 승리의 담화들」중에서
더욱이 나는 위격론적 주해의 가정, 세부 사항, 그리고 함의들이 기독론의 역행적 발전을 시사하는 학술적 논제들을 실질적으로 약화시킨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선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지 않았다가, 그가 부활 시에 아들로 입양되었을 때 비로소 그렇게 간주하게 되었으며, 그 후 예수의 아들 됨이 시간적으로 역투사되었다는 생각을 허문다는 것이다. 반대로 위격론적 주해는 우리가 가진 초기 기독교 자료들의 기독론이 후기 자료들의 기독론만큼이나 고기독론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된다. 위격론적 주해를 기법을 사용했던 사람들은 예수를 선재하는 위격, 즉 아들로 간주했으며, 이같이 그는 성육신 이전에 성부 하나님과 대화하실 수 있는 분으로 여겨졌다. 개괄적인(recapitulative) 신학적 결론으로서, 아마도 초기 교회에 나타난 삼위일체 위격들이 무한히 자신을 내어주는(self-giving) 내적 생명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그리스도의 배역 안으로 몰입해 들어간 성령을 통해 다윗이 발화한 것으로 여겼던 다음 말씀에 가장 잘 포착되어 있을 것이다.
---「에필로그: 해석된 하나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