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 시인의 말 ]
결핍과 연민으로 빚은 시의 성채,
첨탑은커녕 이무깃돌도 되지 못한 채
고자누룩해진 황혼이다
하지만 가뭇없이 소멸하는 것이 두려워
생의 끝날까지 시를 빙자해
꽥꽥― 소리를 지른다
모든 것이 소멸한 뒤에도
단 한 사람에게라도 가닿아,
나는 한 줄의 숨결로 남고 싶다
2026년 가을
와유당臥遊堂에서
황원교
책 속에서
매일 쓰는 유서
차라리 일시에 전소되었다면
이토록 눅눅한 통증이 계속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안개 낀 새벽,
창틀에 고여 있는 것은
밤새 나를 사르고 남은 희미한 그을음,
불은 쉽게 소멸을 허락하지 않는다
잿더미 깊은 곳에 남은 불꽃이 있어
나는 매일 문장의 형식을 빌려 유서를 쓴다
그것은 종이의 마른 살결 위에
겨우 숨 한 모금을 얹어두는 일
잉크가 푸른 멍처럼 번진 자리마다
끝내 자전하지 못한 시간이 고여 있고,
마침표의 벼랑에 이르면
자꾸만 느린 보폭이 엉겨 붙는다
차마 지우지 못한 단 한 줄이
질기디질긴 칡넝쿨처럼 뻗어 나와
내일의 목을 끌어당기고 있다
아니, 칭칭 감는 중이다
불꽃의 기하학
내 가슴의 안쪽에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한 날갯짓이 서식한다
콩나물국에 허벅지를 데었던 유년의 흉터에서
잔열은 뒤늦게 붉은 꽃의 골조를 복원해내고
그 결을 따라 불꽃의 기하학이 다시 되살아난다
비록 비상의 연대기는 끊겼을지라도
존재의 진동은 심부에서 맥박을 고르며
동심원의 파문으로 흉벽을 가볍게 타격한다
문득
날면서 추락하는 새는 있어도 날면서 죽는 새는 없다는
어느 소설 속 문장의 서늘한 행간이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어둠 속에서 번뜩인다
허공을 부유하던 하루가 뼈마디를 긁어낼 때
나는 내 안의 헛헛한 날갯짓으로
척박한 대기 위에 미세한 균열을 새긴다
황혼의 조도가 낮게 가라앉는 저녁,
그 울림은 휘발되지 않고 사물들의 모서리에 매달린 채
발화 직전의 뜨거운 호흡처럼
미처 열기가 식지 않은 채로
오래도록 내 몸의 궤적을 증명한다
공명의 방식
입술을 떠나는 순간 산화하는 것들을
기어이 종이 위에 붙잡아두고
나는 그 진실의 숨을 남기려 한다
하여 시를 쓰는 일은
날이 갈수록 폐허로 변해가는 세상을 향해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는 행위이며
아무도 없는 빈방일지라도
누군가의 체온이 남아 있기를 바라며
빈 의자에 말을 건네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문장은 늘 골절된 채로 발설되고
너라는 해안에 미처 닿기도 전 좌초하기에
늘 절망의 벽 앞에 서곤 한다
다만 미완의 뜻들이 너의 긴 침묵 사이에서
가느다란 맥박으로 이어지길 기다리는
나는 나의 결핍을 수선하지 않는다
이것은 소통이라는 미명보다는
끝내 가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허공을 휘젓는 처절한 손짓 또는 몸부림이며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방향으로
온전히 나를 밀어내는 투명한 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된다
종은 스스로 우는 법이 없다는 것을
어둠의 배면을 치고 되돌아오는 미세한 전율이 있어
나는 또다시 쓰게 된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나는
소리 없는 그 아우성들을 꾹꾹 눌러 담는다
언젠가 너의 내벽에 닿아
아주 작은 금이라도 낼 수 있기를 소망하며
그때야 비로소
나의 비명은 생동하는 언어가 되고
나의 침묵은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 떨리는
하나의 공명이 될 것임을 믿기에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