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세계가 힘겨울 때 새로운 서사가 시작된다
이 책이 다른 서사학 입문서들과는 다른 특징은 서사학의 주요 창시자들(바르트, 주네트)과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맑스, 니체, 프로이트, 루카치, 바흐친, 아우어바흐 등 철학과 문학 이론에서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퍼킷은 이들의 주요 철학적ㆍ이론적 쟁점을 짚어 가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이들의 이론이 사실은 당대의 역사적ㆍ사회적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산물이었음을 밝힌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만든 무질서 앞에서 헤겔은 그것을 ‘절대정신의 자기 실현’이라는 역사의 진보 서사로 해석해 낸다. 또, 루카치는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소설이라고 하는 근대적 서사가 고대인과는 달리 고향을 잃어버린 근대인들이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양식임을 밝힌다. 크리스테바, 바르트, 주네트에서 형성되는 ‘서사학’의 발흥 역시 68혁명이라는 현대적 위기 상황에 대한 이론적 대처 과정에서 등장하게 된다.
요컨대, 퍼킷의 <서사 이론>은 철학과 사회적 위기와 서사 이론을 씨줄과 날줄로 엮음으로서, 서사 이론이라고 하는 것이 교과서에 박제된 낡은 이론이 아니라, 사실은 사회적 위기를 섬세하게 감지하는 이들이 쓰는 유용한 도구임을 밝힌다. 이 책은 따라서 서사 이론을 역사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이들뿐 아니라, 철학 및 이론과 서사의 관계에 관해 체계적으로 살펴보고 싶은 이들에게도 필독서가 될 것이다.
역자의 말
“대다수 입문서가 이 세 번째 전통이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주력한다면, 퍼킷은 ‘왜’를 묻는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왜 사람들은 하필 어떤 특정한 시점에 서사라는 문제로 돌아섰는가? 이 물음을 따라 그는 서사 이론을 자족적 방법론이 아니라 시대와 삶의 핵심 문제들과 씨름해 온 비판적ㆍ철학적 기획의 한 갈래로 다시 읽어낸다. 그리하여 이 책은 니체와 푸코적 의미에서 일종의 계보학이 된다. 잊혔거나 가려진 연결의 선들을 다시 그어, 서로 무관해 보이던 사상과 제도와 담론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작업 말이다. 퍼킷은 줄곧 서사를 다룬 이 텍스트들을 ‘결을 거슬러’ 읽는다. 이 텍스트들이 서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종종 다른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는 가정 아래, 퍼킷은 서사 이론을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서사로―의미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관한, 시대마다 다른 사유로―읽어내는 것이다.”
책 속에서
“나는 몇몇 서사 이론들의 사용, 힘, 명백한 필요성, 그리고 실제적인 강렬함―때로는 심지어 파토스―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역사적이고 개념적인 논증을 제시하고 싶다. 결과적으로 나는 여기서 서사에 대해 사유하려는 노력의 느슨한 역사를, 서사가 오늘날과 같은 학문적ㆍ문화적 중심성을 갖기 시작한 것은 어떻게였고, 언제였는지에 대한 설명―괜찮다면, 또 다른 서사―을 구성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서론: 이야기/담화’ 중)
“서사가 한계에 부딪히고 한계를 넘어선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사물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해 어떤 말이라도 하기 위해 기사의 움직임이나 비뚤어진 길이 필요한 순간에 서사 이론을 전개하는 일은 가능하고 또 필수적이다. 토머스 칼라일은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건강이 어떤지 모르며 오직 아픈 사람만 그것을 안다. 이것은 의사의 격언이며, 그가 의미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에서 적용될 수 있다’라는 말로 자신의 에세이 특성을 시작한다. 디디온이 암시하는 것 역시 이것이다. 즉, 서사가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서사는 가시화되고 따라서 이론을 요청한다. 서사는 자신이 ‘아플’ 때 이론을 필요로 하는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서론: 이야기/담화’ 중)
“헤겔에게 철학의 가장 큰 도전은 관념과 사물 간의 거리―칸트가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던 거리―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노력을 통해 사유하기 위해, 헤겔은 각기 다른 수많은 서사적 모델을 이용했고, 외양상 안정된 상태나 분열이 새로운 관념, 사건, 가능성의 부정적 도입에 의해 어떻게 전복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는 세계 해석을 전개했다. 이 과정이 헤겔이 변증법이라 부르는 것이며, 변증법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서사 이론이다. 헤겔의 철학과 세계를 뒤흔든 프랑스 혁명의 경험에 대한 그의 반응은 우리가 지성사에서의 서사적 전환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의 시작이었다. 서사에 대해 사유했을 뿐 아니라 서사를 우리가 역사와 의식을 이해할 수 있는 수단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헤겔은 이후의 사상가들과 비평가들이 다양한 서사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을 불가피한 일로 만들었다.” (2장 ‘행동, 사건, 갈등: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 중)
“서사 이론들은 사회적 전환이나 사회적 위기 시기에 대한 응답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건들과 그 사건들의 공유된 의미 사이의 관계가 불안정해지고 따라서 가시적으로 드러나 보일 때 서사 이론들이 등장한다.” (4장 ‘서사시, 소설, 서사 이론: 제임스, 루카치, 바흐친, 아우어바흐’ 중)
“내가 살펴본 인물들은 우리가 서사 이론의 지적 원천 중 일부를 보고, 세계를 알기 위해 서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자명해 보이는지를 이해하며, 우리의 경험이 왜 이야기와 담화 그 사이 어딘가에서 가장 잘 포착되는지를 이해하려는 더 큰 노력에 수반되는 한계와 가능성들을 추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달리 말하면, 내가 검토한 인물들은 단지 서사를 하나의 문제로 드러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서사가 왜 이전부터, 그리고 정말로 왜 아직 여전히 우리의 문제로 남아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서사 이론을 전개하는 것이다.” (6장 ‘서사학과 서사 이론: 크리스테바, 바르트, 주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