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읽는 법이 문체가 되고, 읽어온 시간이 생애가 된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평생의 독서로 증명한 ‘읽는 인간’의 길
태풍이 몰아치던 밤, 산장에서 술에 취해 잠든 아버지를 장애가 있는 아들이 흔들어 깨운다.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꿈이니까요!” 오에 겐자부로는 이 장면을 소설로 썼다. 그날 밤 그가 중얼거리던 것은 오랫동안 읽어온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였고, 그 시를 읽으며 붙들고 있던 것은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의 무게였다. 그에게 책을 읽는 일은 삶에서 잠시 물러나 쉬는 일이 아니었다. 삶의 가장 절박한 문제를 붙들고 버티는 방식이었다.
『읽는 인간』은 이처럼 ‘읽는 것’과 ‘사는 것’, 그리고 ‘쓰는 것’이 한 사람 안에서 어떻게 하나로 엮이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오에는 평생 곁에 둔 책들을 하나씩 꺼내 보이며, 그 책이 언제 자신에게 왔고 어떻게 읽혔으며 어떤 소설로 다시 태어났는지 들려준다. 책은 이 여정을 두 개의 축으로 나눈다. 1부 ‘산다는 것, 읽는다는 것’이 읽기의 방법을 다룬다면, 2부 ‘읽으며 나이 든다는 것’은 읽기의 시간을 다룬다.
1부에서 오에는 자신의 독서법을 아낌없이 공개한다. 핵심은 ‘다시 읽기’다. 처음 읽을 때는 말의 미로에서 헤매지만, 다시 읽으면 방향을 가진 탐구가 된다. 번역서와 원서를 나란히 놓고 대조하고, 사전을 끝까지 찾고, 한 작가를 정해 몇 년씩 파고드는 그의 방법은 느리고 집요하다. 그러나 그 끝에서 그가 얻은 것은 지식이 아니라 문체였다. 타고난 문체가 없다고 고백하는 소설가가 번역과 원문 사이를 오가며 자기만의 문장을 세워간다. 잘못 읽은 대목마저 버리지 않고 소설의 재료로 삼는다. 이 과정은 읽기가 곧 쓰기의 시작임을 보여준다.
여기서부터 책은 방향을 튼다. 2부에서 읽기는 기술이 아니라 시간의 문제가 된다. 쉰 살을 앞두고 문학을 계속할지 스스로 되물으며 단테의 『신곡』을 펼친 일, 젊은 날 읽은 책이 수십 년 뒤 전혀 다른 뜻으로 다가온 경험, 평생의 친구를 잃은 뒤 함께 읽었던 책으로 돌아가 그를 애도한 시간이 이어진다. 나이가 들수록 책은 새로 읽히고, 읽기는 점점 먼저 간 이들과 함께하는 일이 된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오에 문학으로 들어가는 가장 친절한 입구라는 점이다. 『개인적인 체험』,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 같은 작품이 어떤 삶과 독서에서 태어났는지를 작가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청중 앞에서 한 강연을 바탕으로 한 만큼 문장은 다정하고 곳곳에 유머가 배어 있다. 또한 책 끝에 실린 ‘오에의 서재’는 강연에 등장한 책들의 국내 번역 현황까지 정리해, 거장의 서가를 독자 자신의 서가로 옮겨 오는 길잡이가 된다.
『읽는 인간』의 가장 큰 가치는 읽기를 ‘다시’ 시작하게 한다는 데 있다. 빨리, 많이 읽는 것이 미덕이 된 시대에, 이 책은 한 권을 오래 곁에 두고 거듭 읽는 일이 한 사람의 문장과 삶을 어떻게 빚어내는지 보여준다. 꾸준히 읽다 보면 평생 곁에 둘 책이 저절로 다가온다고 오에는 말한다. 아직 그 한 권을 기다리고 있는 모든 독자에게, 이 책은 그 길을 먼저 끝까지 걸어간 거장이 건네는 마지막 강의다.
추천사
오래전부터 그를 좋아했다. 그가 일본 국수주의를 비판하고 평화운동에 매진한 게 이유는 아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여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가 어린 시절,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어렵사리 구해주신 책을 읽은 게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회고한 대목을 읽고 난 후부터다. 그는 아홉 살 때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고 책에 빠져들었다. 주인공 허클베리 핀이 흑인 청년 짐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말한 구절에 매료돼 이를 평생 지침으로 삼았다. 나 역시 아홉 살 때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준 것은 책이었다. 평생 글을 쓰며 살았지만 정작 나를 만든 건 내가 읽은 남의 문장이었다. 이 책은 내가 미처 몰랐던 책을 소개할 뿐 아니라 읽고 싶게 만든다. 나아가 우리가 왜 책을 읽어야 하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어떤 책이 나를 만들었는지 일깨워준다. 그리고 마침내 읽는다는 건 산다는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읽고 나면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다시 읽게 된다. 다 읽고 난 소감은 부끄러움과 부러움이다. 그처럼 읽지 못한 내가 부끄럽고, 실컷 읽다 간 그가 부럽다.
_강원국(작가,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