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대부분의 유명 추리소설에서 흑인이나 아시아인 등의 유색인종은 범죄자로 등장하여 백인 탐정에게 체포된다.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을 내면화한 영국의 고전 추리소설부터 흑인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한 미국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 이르기까지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는 인종주의에서 태어나 성장해 왔다.
정통 문학에서 배제되기 쉬운 소설 장르를 대상으로 그 문학 지형을 탐색해 온 저자는 이 책에서 추리소설의 인종주의에 맞선 흑인 추리소설들, 특히 체스터 하임즈와 월터 모즐리의 흑인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살펴본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들은 인종주의적 편견과 폭력의 장르였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흑인의 장르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노력한 대표적인 흑인 작가로서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끌었다. 특히 모즐리의 이지 롤린스 시리즈는 클린턴 전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추리소설이 등장할 때 형성된 인종적 생태계는 여전히 굳건하며, 추리소설은 여전히 흑인을 착취하고 무슬림을 처벌하며 아시아인을 배제하는 백인의 장르로 남아 있음을 지적하며 논의를 마무리한다.
‘책머리에’ 중에서
추리소설은 백인의 장르다. 백인의 우월함을 전시하고, 백인의 지배를 옹호하고 지지한다. 거칠게 말한다면, 추리소설에서 피부색은 등장인물의 역할을 결정한다. 유색인종은 범죄를 저지르고 백인 탐정은 유색인종 범죄자를 체포한다. 피부의 색깔에 따라 수사 주체와 처벌 대상으로 구분하는 것은 추리소설의 오래된 인종적 문법이다.
영국 고전 추리소설에서 흰 피부의 탐정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희지 않은 피부색을 가진 범죄자와 맞선다. 탐정은 합리적 추론과 첨단 과학기술을 사용해 야만적인 식민지 출신 범죄자의 위협으로부터 제국을 보호한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 탐정과 범죄자의 피부색 대비는 더 단순하고 뚜렷하다.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이를 부끄러워하거나 민망해하지 않으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고 자랑하던 영국과는 달리,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등장한 미국에서는 노예제 시절에 구성된 백인 농장주와 흑인 노예라는 단일한 인종 구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 흰 피부의 탐정은 압도적인 기세와 신체적 능력으로 검은 피부의 범죄자를 가혹하게 응징한다.
고전 추리소설부터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 이르기까지, 추리소설은 인종주의 속에서 태어나 인종주의에 기대 자랐다. 고전 추리소설이 다양한 비백인 인종에 대한 편견을 내면화했다면,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흑인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분출했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백인 여성을 성적으로 위협하는 흑인 남성에 대한 백인 남성의 폭력적 처벌을 장르의 기본 서사로 삼아 번성했다.
(중략)
이 책에서 나는 먼저 고전 추리소설과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인종적 문법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추리소설의 백인 지배에 맞선 흑인 추리소설의 계보를, 흑인 탐정 추리소설, 흑인 여성 탐정 추리소설, 흑인 하드보일드 추리소설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흑인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추리소설의 인종적 편견에 저항하고 인종주의를 분쇄하는 역할을 가장 앞에서, 가장 치열하게 수행했다.
(중략)
흑인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살펴볼 때, 나는 하임즈(Chester Himes)와 모즐리(Walter Mosley)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려고 한다. 두 사람은 인종주의적 편견과 폭력의 장르였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흑인의 장르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분투한 대표적인 흑인 작가이기 때문이다.
두 작가는 저마다 다른 시대적 조건 속에서 소설을 썼다. 하임즈는 극단적 반공주의인 매카시즘(McCarthyism)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고 흑인 민권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이전의 시기에 주로 활동했다. 반면에 모즐리는 흑인의 인권이 비약적으로 개선된 1980년대 말 이후 소설 쓰기를 시작했다. 이들이 다룬 지역도 미국의 동부와 서부로 다르다. 하임즈가 뉴욕 할렘을 배경으로 삼아 할렘 시리즈(Harlem Cycle)를 썼다면, 모즐리는 로스앤젤레스를 무대로 이지 롤린스 시리즈(Easy Rawlins Series)를 집필했다.
하임즈는 할렘 시리즈를 통해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문법을 해체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범죄성의 인종적 배치를 뒤바꾸고, 탐정의 직업에도 변화를 주었다. 전통적인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는 흑인이 범죄성을 구현하지만, 할렘 시리즈에서는 백인이 범죄성을 대표한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는 부패하고 무능한 경찰에 맞서 자신만의 직업윤리를 고수하는 백인 사설탐정이 수사의 주체가 되지만, 할렘 시리즈에서는 경찰 조직에 속한 흑인 형사를 수사의 주체로 내세운다. 하임즈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인종적 범죄성에 균열을 내고, 인종적 편견에 맞서는 흑인 형사를 동원해 공권력에 내재한 인종주의를 폭로한다.
모즐리는 아예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다시 쓰는 방식으로 이지 롤린스 시리즈를 시작했다. 시리즈의 첫 소설인 『푸른 옷을 입은 악마(Devil in a Blue Dress)』는 가장 널리 알려진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인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Farewell, My Lovely)』을 오프닝부터 다시 쓴다. 두 소설 모두 백인이 흑인 전용 술집에 들어오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하나는 백인의 시점에서, 다른 하나는 흑인의 시각에서 서술된다. 『푸른 옷을 입은 악마』보다 뒤에 나온 이지 롤린스 시리즈가 원숙함에서 더 뛰어나다고 할 수는 있지만,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흑인의 장르로 만들겠다는 모즐리의 결기와 각오는 첫 소설에서 가장 빛난다.
(중략)
하임즈와 모즐리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이다. 할렘 시리즈와 이지 롤린스 시리즈를 비롯한 두 사람의 소설 대부분이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 나는 하임즈와 모즐리의 소설을 가능한 한 폭넓게 소개하고, 소설에서 최대한 많이 인용하려고 했다. 이 책이 하임즈와 모즐리라는 뛰어난 흑인 추리작가를 경험하고 그들과 친숙해지는 장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