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저자의 말
4년간 써온 시들을 끄집어 내
그동안 질퍽했던 삶의 이야기를
4번째 시집으로 묶어본다
고단했던 풍경을 시집에 담아
세월 따라 흘러갔으면 좋겠다
책 속에서
세월
거울 속 내 얼굴이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할 때
나는 추억을 잃고 헤매는
잘린 늙은 소나무가 되었네
저녁이 되면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 속에서
반 토막으로 쪼개진 영혼을 올려다보네
총총히 박혀있는 별들을 바라보며
시어를 잃어버려 머릿속을 헤집어도
붉게 물들어 가는 세월
곱게 접으며
수천 개의 기억이 노랗게 단풍 드네
마당이 핀다
출산을 마친
어미의 가슴처럼
부푼 젖꼭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앞마당
화선지에 눈을 그리면
자궁속 선혈처럼
쏟아져 나오는 꽃
가슴속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
명자나무 봉오리는 다시 움츠리고
등과 무릎뼈 떨어져 나가는 통증을 넘어
다시 깨어난 환하게 피어나는 나무
이른 봄 햇볕에 눈이 녹아내리면
붓을 놓고 문밖으로 나가는 손
발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눈 하나 줍는다
여린 눈 뜰 것 같은
붓 끝에 스며든 붉은 빛 봉오리
겨울 끝
눈발이 쌀알처럼 쏟아지는 까만 밤
나는 은행리에 화분처럼 놓여있네
돛대 꼭대기
눈꽃 내린 기둥 위에
눈먼 새 한 마리
어미 찾아 구슬피 울고
함박눈은 수의처럼 어둠을 덮고
창밖엔 자동차 불빛이
길을 가르고
까맣게 보이는 감나무
분절된 모습은
구부러진 등에
하얀 깁스를 하고 있네
깊은 밤 허리 어깨
고양이 발자국 소리
눈 속에 스며들고
생강나무 심줄 타고 가는
푸른 링거 소리
바람에 흔들린다
찬밥
나는 식탁에 서서
찬밥에 물 말아
고추에 된장 찍어 먹고
엄니는
밤새 이슬 맞힌 보리밥
찬물에 물 말아
장독대에 서서
된장에 고추 찍어 먹고
들에 가신다
오늘도 나는 찬밥에
물 말아 놓고
빈 하늘에
그림 그린다
사이와 사이
풍뎅이 한 마리 안방을 점령했다
바람을 일으킨다
배를 하늘에 올려놓고
바닥을 닦기 시작한다
로봇 청소기가 되었다
선풍기도 되었다
씽씽 돌던 풍뎅이
날개와 달리 물기가 사라졌다
서리 맞은 국화꽃은
알 리 없지
풍뎅이 바람이 여기 있다는 걸
친정
우물가에 앵두나무 서 있지
낮이 가장 긴 날
붕어
해를 잡아보네
추천사
윤현순 시인의 시는 삶의 한복판에서 길어 올린 감각적 수채화이자, 몸에 새겨진 계절의 흔적을 담아내는 생생한 필름이다. 시인이고 화가이며 영화감독으로서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창작의 영역을 넓혀 온 그녀를, 주변 사람들은 ‘고3’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녀는 일평생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고3 수험생 같은 뜨거운 집중력과 성실함으로 삶과 예술에 몰두해 왔다.
시인의 언어는 “엄마의 안에서부터 삭아가는 노른자”처럼 서정의 아픈 기저음을 눅진하게 품으면서도, 화선지 위로 쏟아지는 붓끝의 붉은 봉오리처럼 강렬하고 생생한 이미지를 피워낸다. 그녀의 시에는 발효된 삶의 항아리 속 깊이 가라앉은 시간을 건져 올리듯, 생의 마디마다 빼곡하게 박힌 통점들을 재치 있는 시어로 길어 올린다.
자신의 고통과 상처마저 뜨겁게 사랑하고 긍정하는 니체의 운명애(Amor Fati)처럼, 시인은 ‘그냥 그대로’ 피고 지는 서러운 계절과 삶의 그늘까지도 담담하게 껴안아 시로 풀어낸다. 회화와 영화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그녀의 시는 독자의 가슴속에 진한 울림을 준다. 굳은 땅을 뚫고 피어나는 섬세한 생의 붓질 소리가 바로 여기, 윤현순 시인의 시 속에 아롱져 있다.
- 김나비 (시인·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