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검열과 미술의 관계는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국가검열은 국가가 표현을 금지하고 예술가가 이에 순응하거나 저항하는 단선적인 구도로만 작동하지 않았다. 《검열과 월경의 미술사》는 국가의 금지 명령과 이를 해석·집행하는 권력 기구, 그리고 검열을 미리 의식하고 전략적으로 표현의 가능성을 조정한 미술인들의 선택이 빚어낸 ‘상호구성적’ 관계에 주목한다. 미술이 기존의 통치 질서(치안)를 교란하고 감각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국가는 검열이라는 수단으로 이를 다시 통제하려 했으며, 미술인들은 그 틈새에서 순응과 저항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선 독자적인 생존과 발언의 전략을 모색했다.
저자는 권력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면서도 표현의 최소 공간을 모색한 ‘절충적 자체 검열’과, 은유 및 매체 전환을 통해 통제망을 교란하고 우회한 ‘전술적 자체 검열’로 이를 구분해 분석한다. 1980년 비상계엄이라는 정국 속에서 개최된 《현실과발언 창립전》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과 동산방 화랑으로 이어지는 전시 과정에서 주재환의 〈차렷, 경례〉나 김건희의 〈얼얼덜덜〉 같은 작품들은 당국의 탄압과 인쇄소의 제재를 우회하기 위해 도판을 교체하거나 신문 기사 인쇄 부분을 검게 지우는 식의 자체 검열을 거쳤다. 책은 이러한 타협과 우회의 선택 역시 권력의 요구에 단순히 굴복한 것이 아니라, 한계 속에서도 비판적 발언을 이어 가기 위한 ‘전술’이었음을 입체적으로 증명한다.
반공적 검열에서 가부장적 도덕주의 검열로
이 책은 196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현대미술사를 관통하며, 국가검열을 작동시키는 지배적인 메커니즘이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밝힌다. 이승만 정부부터 노태우 정부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검열을 지배한 핵심 축은 분단 체제와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반공적 치안 체계’였다. 정부에 대한 직접적 비판, 통일 논의, 노동운동 및 반미 의제는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등을 통해 불온시되고 봉쇄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냉전 해체와 1990년대 이후 제도적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검열의 중심축은 보수적 성 규범과 가부장적 공공성에 기반한 ‘가부장적 도덕주의 치안 체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반공주의가 약해진 자리에, 남성 중심의 성 규범을 벗어나거나 기존의 가족 및 도덕 관념에 균열을 내는 여성주의 미술, 성·젠더 관련 표현들이 ‘음란’과 ‘풍기문란’이라는 굴레를 쓰고 새로운 통제의 대상이 된 것이다. 페미니스트아티스크그룹 입김의 《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트》와 미술 교사 김인규의 〈우리부부〉 사건이 대표적이다. 책은 이 같은 시각 통지의 역사적 이동을 추적하며, 국가검열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옷을 갈아입으며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끊임없이 예술의 자유를 위협하는지를 드러낸다.
민중미술을 다시 읽다
이 책은 보통 1980년대의 전유물로 여겨져 온 민중미술의 역사적·미학적 뿌리를 재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저자는 1980년대 민중미술이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1960~1970년대에 전시장 바깥으로 나가 권위주의 체제와 기성 화단에 반기를 들었던 청년 작가들의 실험적 실천에서 그 싹을 발견한다. 책에는 1967년 무동인·신전동인·오리진의 20대 청년 미술인들이 국전의 보수성과 정부의 미술 정책에 맞서 “행동하는 화가”, “좌상파 국전” 등의 손팻말을 들고 나선 《청년작가연립전》의 거리 시위부터, 1970년 기성 문화와 독재 체제의 매장을 선언하며 관을 메고 거리를 행진한 제4집단의 〈기성 문화예술과 기존 체제의 장례식〉에 이르기까지의 저항사가 생생히 펼쳐진다. 나아가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제도적 공간 한복판에서 신체를 매개로 권위주의적 명령을 희화화한 이건용의 이벤트(〈건빵먹기〉, 〈이리 오너라〉), 민전(동아미술제)에 문명 비판의 외피를 씌워 주한미군 철수와 반미주의라는 금기를 출품했던 변종곤의 〈1978년 1월 28일〉 등은 1980년대 민중미술이 보여 준 집단적·대중적 개입의 직전 단계이자 한국 현대미술이 획득한 자산이었음을 일깨운다.
풍부한 사료와 생생한 인터뷰로 되살려낸 한국 현대미술사
이 책에는 기존의 한국 현대미술사 책들에서 보기 어려운 미술인과 관계자, 그리고 다양한 장르의 미술 작품이 여럿 등장한다. 저자는 일간지 기사, 잡지, 팸플릿, 판화집, 경찰의 수사 기록 및 공소장, 재판 판결문 등 수많은 일차 사료를 추적해 검열이 이뤄진 구체적인 정황을 복원한다.
무엇보다 당시 검열에 직면했던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역사 속에 묻힐 뻔한 순간들을 입체적인 현실로 끌어올린다. 책에는 1980년 7월 광주항쟁의 국가 폭력을 증언했다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강제 철거된 조각 〈시민-I〉의 최민화, 1985년 전두환 정권의 금기를 전면화하며 폭압적인 압수와 검열을 겪었던 《한국 미술, 20대의 힘》의 기획자 박불똥, 노동 만화 〈깡순이〉와 〈사장과 진실〉을 그리다 보안사에 체포되어 국가보안법으로 법정에 섰던 이은홍 등의 증언이 실려 있다. 또한 국경을 넘어 퍼진 홍성담의 〈대동세상〉 판화와 오월 판화집 《새벽》의 유통 과정, 전국 200여 명의 미술인과 학생이 집단 제작해 평양축전에 슬라이드 필름으로 전달되었던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를 둘러싼 안기부의 고문과 사법 파동 등에 대한 증언이 생생함을 더한다.
책 속에서
나는 이 변화를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 살펴보기 위해 단행본, 잡지, 신문, 기관지, 구술 채록문 등을 수집하되, 시기별로 미술의 주제·매체·장소 차원에서 감각 실천 확장과 국가검열이 충돌한 사건을 선별하고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미술이 감각 질서의 경계를 넘어서면, 국가권력은 이를 기존 질서를 흔들 불온한 사건으로 간주하고 검열을 통해 허용 가능한 주제와 표현 방식의 경계를 재설정하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미술이 치안 체계를 교란하고 정치의 국면을 열어젖히는 순간마다 국가는 이를 검열이라는 통치 장치로 복원하려 했으며, 미술은 또 다른 감각 실천을 통해 검열을 벗어나려 했다. 이처럼 감각 실천과 통치 기술이 서로를 구성해 온 관계를 ‘상호구성적’이라 표현할 수 있다.
--- p.14~15
이 글에서 살필 수 있듯이, 〈건빵먹기〉의 핵심은 건빵을 먹는 행위보다 그 행위를 점점 어렵게 만드는 조건이 신체에 축적되는 과정이다. 반복되는 붕대 감기와 추가되는 “판대기”는 점차 신체를 제한하는 과정을 시각화하며, 권위주의적 질서가 일상 행위마저 어떻게 규율하고 통제하는지를 드러내는 은유가 된다. 이 이벤트는 신체의 점진적 구속과 그에 맞서는 움직임--- p.허리의 굽힘 등)을 통해 억압받는 주체가 어떻게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표현의 가능성을 모색하는지를 보여 준다. 다시 말해 〈건빵먹기〉는 보이지 않는 국가권력의 통제를 간접적으로 시각화한 시도라 할 수 있다.
--- p.61
김건희는 해적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현대 의상과 소품을 갖춘 여성들이 “얼얼덜덜”이라는 의태어와 어우러진 빙과 광고 사진을 작품에 배치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김대중의 내란 음모 사건 수사 결과를 담은 기사를 배치했다. 이를 통해서 군사반란을 일으킨 군부 세력의 사법 폭력을 풍자한 것이다. 군사반란과 광주 시민 학살을 주도한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상황에서 당국은 〈얼얼덜덜〉이 김대중을 옹호하는 의도를 담았다고 여기고 현실과발언을 탄압할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최민의 당부처럼, 당시 김건희의 남편이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기에 〈얼얼덜덜〉이 그대로 전시되면 전두환 정권의 탄압이 현실과발언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그의 남편이 몸담은 노동운동계로 번질 가능성이 있었다.
--- p.102~103
홍성담: 그런 식으로 우리가 --- p.〈민족미술 열두마당〉)을 뺏기잖아요. 그러면 이제 달력의 --- p.오프셋 프린트) 원판 필름을 인쇄소에서 빼와가지고, 다른 인쇄소에 의뢰해서 제작을 마쳤을 거예요. --- p.…)
홍태림: 추가 제작을 해서 또 --- p.달력)을 유통한 거군요. 그럼 초판 인쇄할 때 다 압수되지도 않았고, 압수 이후에도 필름은 인쇄소에서 빼서 추가 제작도 했으니, 4만 개 이상 만들었을 수도 있겠네요.
홍성담: 아마 그랬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때는 그런 달력이 굉장히 귀해서, 만들어 놓으면 많이 팔렸거든요.
--- p.149
노태우 정부는 잇따른 방북 사건을 계기로, 제5공화국 청산 요구에 따른 정치적 위기를 공안 정국으로 돌파하고자 안기부, 검찰, 치안본부가 참여하는 공안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국가보안법을 강력히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에 민미련과 학미련은 차선책으로 1989년 6월 중순, 전대협 대표로 방북한 임수경을 통해 〈민족해방운동사〉의 슬라이드 필름을 북한에 전달했다. 그 뒤 원본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는 한양대학교에서 순회 전시를 진행하던 중 경찰에 의해 강제 파괴되었다.
--- p.205
《시민의 신문》을 접한 이씨 종친회는 축제가 열리기 전인 9월 27일, 입김에 행사 장소를 바꾸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축제를 저지하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입김은 다음날 종로경찰서에 신변 보호를 요청하고 작품 설치를 이어 갔다. 그러자 프로젝트 개막일인 9월 29일 아침 9시부터 이씨 종친회, 종묘제례보존회, 정통가족제도수호범국민연합 사람들이 입김 구성원을 쫓아다니며 욕설, 작업 방해, 작품 훼손 및 파괴 등의 무력을 행사하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당시 이씨 종친회 대표는 250명 정도가 《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트》를 저지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 p.243~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