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시인의 말
때
밀어드릴까요
아뇨
지금 밀지 않으면
지금이라는 말은 각질처럼 사라질 거예요
저 다음에 밀게요
다음이라
그때 제가 거기에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누구나 때가 있지요
엄마의 자궁을 떠나
세상이라는 때를 얻은 우리들,
공평한 우리들
책 속에서
신호등을 뒤집어놔서 훔쳐 왔어요
내일이 일요일인지 모르고 톡톡 터지는 레드향처럼 까먹는 엄마
집 하나 긁어놓고, 내일은 아빠하고 등기소에 가서 명의 이전해라 내일이 필요 없는 껍질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내일은 안 돼요
왜?
내일은 일요일
앞으로 읽어도 일요일
뒤로 읽어도 일요일
일일이 답장 못 해서 휴무랍니다
깜박거리는 일요일은 빨강 신호등
양손으로 내일을 감싼다 두 엄지로
반 자르고 반쪽을 또 반 자르고 다른 반쪽을 또 반 자른다
지문 잃은 여덟 손가락으로 빠르게 까는 방법을 배우는 동안 일요일도 없이 울창하게 선 밖으로 굴러다니느라 바쁘다
오늘을 낀 고무장갑은 붉은 잎사귀로 푸른 잎사귀로 22초마다 머릿속을 텅 비운다 핸드폰이 내일로 넘어가는 밑반찬과 함께 냉장고 속에서 코를 곤다 내가 빠른지 느린지도 모르게 코끼리에게 줄 바나나는 샛노란 거짓말
건널목에 서 있는 내일은
빨강
일요일
붉은 눈동자
신호음과 함께 다시 초록 숲으로 뛰어들었다가 여기가 어딘지 방향을 잃고 깜박깜박, 자꾸 까먹는 엄마를 위해 집 안에 신호등을 달았다
----- 28~29쪽
앵두나무 아래로 코끼리가 지나간다
코끼리가 지나간다, 저기 그늘을 타고 앵두가 가지마다 붉게 익던 날 그 말은 유독 진지해졌다
엄마는 웃었다
― 설마, 이 동네에 무슨 코끼리야
나는 엄마보다 할머니의 눈을 믿고 싶었다 오래된 눈이었다 많은 것을 본 눈이었다
나는 앵두나무 아래로 갔다 할머니 눈동자엔 탈출한 코끼리가 긴 코를 흔들며 느릿하게 지나갔다 그 뒷모습엔 먼지 대신 오래된 하루들이 붙어 있었다 나는 무게를 헤아리지 못해 숨을 죽였다
바람이 불고 앵두가 흔들렸다 그 사이로 코끼리의 귀 같은 것이 나풀거렸다 나는 손을 뻗었다
앵두인지 귀인지 모를 것을 잡으려다 그만,
할머니 웃음을 닮은 허공을 쥐었다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이 풀잎을 스치자, 달빛이 앵두나무 아래 앉았다 그때, 나는 보았다 코끼리가 한 걸음씩 우리 마을을 지나가는 것을
할머니 눈에만 보였던 코끼리는 앵두보다 먼저 익은 그늘이었다 자주 바라보던 빈자리에 내려앉은 무게였다
사라진 하루들이 숨 쉬는 자리
할머니가 오래 기다리던
보이지 않는 사랑이 말없이 깃든 자리
지금도 나는 밤이면 앵두나무 아래 선다
아무것도 없는 길목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지나간다
하루들, 말들, 사랑
그리고
코끼리 한 마리
----- 104~1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