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기억이 지워지면 감정도 지워질까
이 책은 AI와 휴머노이드라는 첨단기술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친구의 죽음이라는 상실과 이별의 아픔에 맞닥뜨린 청소년기 아이들이 ‘로봇 만들기’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그 상처를 극복해나가며, 궁극에는 그 상처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려낸다. 무엇보다 ‘기억’과 ‘감정’이라는 소재를 전면에 내세우며, 인간 본연의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작가 나혜원은 이를 위해 중심인물인 리아, 세빈, 이룸의 시선을 일기처럼 교차하며 기억의 파편을 따라가듯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기실, 누군가가 사라지는 순간은 죽음이 아니라 기억에서 잊히는 순간이 아닐까? 리아, 세빈, 이룸이 여명을 닮은 로봇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쳤던 여명과의 기억들을 소환하게 되고, 여명만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서도 되돌아보게 된다. 죽은 여명을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 여명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마음으로 ‘닮1호’를 만들기로 결심하지만, 닮1호가 과연 여명을 대신할 수 있을까? “진짜라는 건 뭘까. 또 가짜라는 건 뭘까. 톰이 만약 린지를 잊는다면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는 임무를 저버릴 수 있을까. 기억과 감정 사이에 얽힌 함수만 해결한다면 톰은 평범한 고철 덩어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일까.”
유달리 습하고 무더운 여름방학 내내 로봇 닮1호를 만들고 마침내 로봇이 완성되었을 때 아이들은 또 다른 질문에 직면한다. “이 로봇은 과연 여명일까?” 작품은 내내 새늘고 1학년 토론 동아리 <논하라> 멤버들이 ‘닮1호 프로젝트’를 통해 죽은 친구를 다시 복원해내는 과정을 거치며,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진정한 이별을 맞이하는 과정을 잔잔하게 보여준다.
책 속에서
그날 이후 그림자처럼 죽음에 따라붙기 마련인 수많은 ‘선택’이란 난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지. 네 자리 위에 국화를 놓는 일, 학교 게시판에 너를 기리는 메모를 붙이는 일, 운구차가 학교 운동장을 한 바퀴 도는 일, 그리고 교실에서 네 책상을 치우는 일……
이 모든 선택이 끝나고 결과만이 덩그러니 남겨진 지금, 나는 여전히 네가 세상에 없다는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지 몰라. 그래서 너를 닮은 로봇을 만들고 있나 봐. 이렇게, 오늘도.
(1.「리아―기억 그리고 감정」, 11쪽)
기억.여명아, 나는 믿어. 인간의 몸 80퍼센트는 물이 아니라 실은 기억을 터질 듯 머금고 있다고. 그로 인해 먹고 자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거라고. 내 기억 속에서 아빠는 슬프게도 시커먼 유령 같은 형상이란 사실을…… 그 인간은 알기나 할까? 기억이 때가 되면 자연히 사라지는 몽고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1.「리아―기억 그리고 감정」, 14쪽)
닮1호(차여명)
이것은 새늘고 1학년 토론 동아리 <논하라>에서 제작한 로봇으로, 버추얼 휴먼의 하드웨어 안에 인공지능 챗봇 기반 소프트웨어를 이식한 휴머노이드였다. 얼핏 외관만 살펴봐도 두상에 섬세하게 이식한 인모, 화상 후 처치에도 쓰인다는 인조 피부, 아크릴이 아닌 순수한 유리를 가공해서 만든 안구 등이 고등학생 셋이서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높은 완성도를 보이고 있었다. <논하라>의 짙은 회색 캐비닛 문을 활짝 열면 쪼그려 앉아 있는 생김새까지, 생전 여명이 멤버들에게 장난치려고 숨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으니까.
(1. 「리아―기억 그리고 감정」, 18~19쪽)
“기억”
“기억……?”
“응. 톰이 린지를 영원히 기억할 거라고, 처음 톰을 데려올 때 린지 아빠가 말했잖아. 기억 말이야. 리아야, 감정이란 건 결국 기억에서 파생되는 건 아닐까? 그리고 AI도 인간처럼……”
감정은 기억에서 파생된다. AI도 기억이 있다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리아는 여명의 그 말이 너무 신기해서 한참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오후가 있었다.
(1. 「리아―기억 그리고 감정」, 42쪽)
그랬다. 이제 ‘닮1호 프로젝트’는 단 하나, 여명의 기억을 로봇의 소프트웨어인 인공지능 챗봇에 입력하는 과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열여섯까지 자기만의 삶을 살아온 여명의 기억 말이다. 세빈과 리아, 이룸은 여명이 그날 밤 왜 물에 뛰어들었는지 이유조차 모르는데,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역시 물리적인 문제보다 추상적인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수밖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으니 말이다.
(2. 「세빈―너라는 존재」, 69쪽)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자 정말 여명이 찾아왔다. 땅 아래 잠겨 있던 태양이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내는 기척은 금세 하늘을 밝혔고, 새늘고 학생들은 개학을 맞이했다. 물론 이룸도.
스스로 소멸을 선택한 닮1호를 보며, 그 무엇도 여명을 대신할 수 없다는 진실만 확인한 어제. 아무리 그럴듯한 프롬프트로 여명의 대역을 소화해낼 로봇을 작동시킬지언정 이 진실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결론에 이르자 이룸은 어쩐지 서글퍼졌다. 이제 떠난 내 친구와는 영원히 안녕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3. 「이룸―엇갈린 미래」, 116쪽)
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른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다다다다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말할 거야, 말해야 해. 지금이 아니면 안 돼.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저만치서 걷던 소녀들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여명이란 이름을 가진 여학생과 그 옆에서 팔짱을 낀 생머리 여학생도 짐짓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리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숨을 헉헉 몰아쉬며 그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여명아, 사랑해! 사랑한다고!” (6. 「리아―이별하는 프롬프트」, 170~1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