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난다시편을 시작하며
손에 쏙 들어오는 시의 순간
시를 읽고 간직하는 기쁨, 시를 쥐고 스며보는 환희
1.
2025년 9월 5일 출판사 난다에서 시집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시를 모아 묶었음에 ‘시편(詩篇)’이라 했거니와 시인의 ‘편지(便紙)’를 놓아 시집의 대미를 장식함에 시리즈를 그렇게 총칭하게도 되었습니다. 난다시편의 라인업이 어떻게 이어질까 물으시면 한마디로 압축할 수 없는 다양한 시적 경향이라 말을 아끼게 되는 조심스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시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모든 말이 시의 언어로 발산될 수 있기에 시인에게 그 정신과 감각에 있어 다양함과 무한함과 극대화를 맘껏 넘겨주자는 초심은 울타리 없는 초원의 풀처럼 애초부터 연녹색으로 질겼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은 단호함은 있습니다.
2.
난다시편의 캐치프레이즈는 “시가 난다winged poems”입니다. 날기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무거움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날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가벼움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바람처럼 꽃처럼 날개 없이도 우리들 몸을 날 수 있게 하는 건 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사랑처럼 희망처럼 날개 없이도 우리들 마음을 날 수 있게 하는 건 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여 온전히 시인의 목소리만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을 빚어보자 하였습니다. 해설이나 발문을 통한 타인의 목소리는 다음을 기약하자 하였습니다. 난다는 건 공중에 뜰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의 말이니 여기 우리들 시를 거기 우리들 시로 그 거처를 옮김으로 언어적 경계를 넘어볼 수 있겠다는 또하나의 재미를 꿈꿔보자 하였습니다. 시집 끝에 한 편의 시를 왜 영어로 번역해서 넣었는가 물으신다면 말입니다. 시인의 시를 되도록 그와 같은 숨결로 호흡할 수 있게 최적격의 번역가를 찾았다는 부연을 왜 붙이는가 물으신다면 말입니다.
3.
난다시편은 두 가지 형태의 만듦새로 기획했습니다. 대중성을 담보로 한 일반 시집 외에 특별한 보너스로 유연성을 더한 미니 에디션 ‘더 쏙’을 동시에 선보입니다. “손에 쏙 들어오는 시의 순간”이라 할 더 쏙. 7.5×11.5cm의 작은 사이즈에 글자 크기 9포인트를 자랑하는 더 쏙은 ‘난다’라는 말에 착안하여 디자인한 만큼 어디서든 꺼내 아무 페이지든 펼쳐 읽기 좋은 휴대용 시집으로 그만의 정체성을 삼았습니다. 단순히 작은 판형으로 줄여 만든 것이 아니라 애초에 특별한 아트북을 염두하여 수작업을 거친 것이니 소장 가치를 주기에도 충분할 것입니다. 시를 읽고 간직하는 기쁨, 시를 쥐고 스며보는 환희. 건강하게 지저귀는 난다시편의 큰 새와 작은 새가 언제 어디서나 힘찬 날갯짓으로 여러분에게 날아들기를 바랍니다.
책 속에서
다리를 비틀면 피 묻은 양이 메에 울면서 나타나고
정원의 꽃들은 수런거린다
새로 온 정원사에게 양은 시 속에서만 울 수 있는
명백히 희생적인 존재
정원사는 오늘 이웃집 남자를 잡아먹었다
맑은 오늘이 생일이라서
오늘만큼은 육식주의자여도 좋은 날
_「좋은가」부분
조명이 밝힌 잠의 마을
죽은 뇌를 씻기는 무드
등을 덮는 직물들
어린 꿈을 꿀 수 있다면
나와 불화할 수 있기를
뽀얗게 유감이 녹고 있다
시와 사람의 음성
싱그럽게 겹쳐 흐른다
풍경을 몰고 오는 여름 소녀가 이젠 나와 놀이하려 하지 않는다 장송 행렬을 보듯 창밖의 빌딩을 심심한 눈으로 그렇게만 지나친다
_「생각과 관」부분
말은 이끼다.
이곳은 단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자살과 무성생식을 반복하는 숲. 버려진 시들이 모여사는 마을이다. 이끼 숲에서 탄생은 곧 지워짐. 언제까지고 상상해봄직한 영원한 조형 세계. 지워진다는 것은 우리의 말이 더는 불안해하지 않는 것. 벌벌 떨면서도 무작정 오염될 필요 없는 것. 시가 돌아온다면 몸을 고쳐서 올 것이고
시를 읽으면 두 발은 잠긴다.
_「감은 눈」부분
진동 또 운명
소리는 앞소리를 밀어내고
내가 펼친 페이지는
욕망하는 인물이 바다로 투신하는 장면
추의 운동을 좇으면
아주 산만한 궤적을 그릴 수 있다
발을 헛디딘 숫자들
장면이 한 꺼풀 벗겨졌다
_「백」부분
법당의 단청 작업을 했던 전문가가 언젠가 했던 말. 오방색은 펑크지. 산사에 머무는 동안 나는 내내 말이 없었다. 반질반질하게 머리를 닦은 휴머노이드가 허허 웃으며 공양하는 모습 따위를 상상하면서. 공양간에서 매끈했던 찻잔 하나를 깨뜨렸다. 시를 썼고, 소리는 그뿐이었다.
_「산사와 나」부분
내가 만든 그늘서 눈알은
부릅뜨기 좋은 상태
그러나 내 뒤로 사람들이 지나갈 때
눈알은 움찔거렸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해초처럼 누워서 왔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유언일지도 모르고
그때 배운 것 같다
사랑하지 않고도 빠져 죽는 마음
떠오른다
어떤 이의 어리숙한 얼굴
꼭 죽을 것만 같았던 사람
_「해변에서」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