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추천사
시인의 전언에 따르면 삶의 매 순간은 직선의 길이다. 직선이 명쾌할 때 길 위에 있는 삶은 오직 정면으로 향해 있고, 실수로 선이 흔들릴 때 삶은 상처 입는다. 길은 매번 앞으로 걸어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한 치의 곁눈질을 할 수가 없을 때, 시인은 그곳에 온힘으로 직선을 긋고 또렷해진 생을 본다. 삶의 외길이라고 해도 좋다. 하나의 흐트러지지 않는 삶은 직선을 긋는 ‘깊고 얇고 섬세한 칼’ 덕분이다. 물론 모든 삶의 시간은 언제나 장애물과 실수투성이여서 상처로 되돌아오기 일쑤다. 칼 혹은 길 앞에 있는 세계를 무디게 대면할 때 칼잡이는 세계로부터 상처를 입는다.(박수연, 해설 「두 개의 힘과 상처의 사유」 중에서)
시인의 말
유년의 지독한 가난과 불우한 사정으로 시작도 못 한 꿈들이 좌절되었기에 생활인으로 거대 자본주의의 중심에서 소모되고 명멸하는 고단한 조리사의 삶은, 이리 살아도 되나, 만조처럼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 날숨처럼 뱉어낸 시편들이 또 세상에 나가는가 보다.
다시는 쓰지 않으리라, 어찌어찌 나룻배 올라타고 건너온 강은 길도 모르는 또 홀로 낯선 시간이었다. 떠나온 곳이 어디였더라, 아슴아슴 돌아보니 안개 강 건너편 나루터가 보이지 않는다. 두려운 마음에 조금은 걱정이 앞선다.
우리 동네 유등천 천변 둔덕은 벌써 묵은 싹 사이로 파릇파릇 푸른 새싹이 돋고 있다. 세상 하찮고 외진 곳 자투리땅이라도 내 시편들이 그렇게 파릇파릇 봄 쑥처럼 돋아났으면 좋겠다.
책 속에서
붉은 찔레 장미는 사납고 뾰족한 경계의 철망이
욕스러워도 때론 버팀목이 되는가 보다
철 이른 더위 바람이 세다
아픈 이름에 기대어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어
안쓰러워 뜨거운 자리마다 붉게 피는가
밥은 자유를 구속하고 비판은 삶이 빈곤했다
낙오의 순간마다 지는 꽃잎처럼 되물었다
잊지 않고 상처에서 다시 꽃을 피울 때 염원할 때
꿈이 짓이겨진 내 안의 상처는
어느 순간에 피었던가, 어느 결에 졌던가
문득 혼자가 되어
무수히 피고 졌던 가지마다 꽃이 진 흉터들
삶은 무섭고도 지독하게 아름다워라,
지금 누리는 행복이 누구의 지난한 아픔이었고
소소리바람 같은 고통이었을까
떠나간 것들이 다시 오지 않는 길목에서도
따뜻한 밥 한 그릇
무수히 진 꽃잎들에게 미안하다
행복도 불행도 겹쳐서 피고 겹쳐서 지는 삶의 자리
잊지 말라고 꼭 그 자리에서 피어나는
상처도 오래 묵으면 꽃이 된다
_「상처도 오래 묵으면 꽃이 된다」 전문
어렸을 적 마치 꿈처럼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마음보다 멀리 더 멀리
바람의 저항까지 생각하여 더욱
힘껏 던졌으나 그것은 포물선을 그리거나
내 마음 끝 반도 못 가 곤두박질치기 일쑤였다
높은 곳에서 날려보기도 하고
때론 낮은 곳에서
하늘 향해 힘껏 던져보기도 하고
재활용품을 버리는 날
차곡차곡 쌓은 폐박스를 분리수거장에
종이비행기처럼 힘껏 던졌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바람의 저항은 보란 듯이
제각각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서
아무렇게나 흩어진다
발등으로 날아와 곤두박질치던 어릴 적 종이비행기처럼
마치 부서진 꿈의 파편처럼
삶이란 그런 거였다
미처 묶지 않아 낱장 같은 시간을
다시 차곡차곡 추려 일기처럼 포개놓는다
가지런히 쌓아놓는다
_「종이비행기」 전문
한 아이 한 여인을 믿고 굽이굽이
남도길 끝자락 외딴섬으로 따라갔었네
사철 갯바람에 해마다 동백은 붉고
물너울만 허옇게 악다구니로 거품 물고
갯바위에 산산이 냅다 삶처럼 깨지고 말던
욕 잘하는 앙칼진 여인에게서
훨훨 죽어서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섬
아이는 커서 섬에 다시 갈 때마다
납덩이를 밭아내느라 영락없이 콜록거리는 가슴은
갯바람만 쌩쌩 들썽거렸다
여인은 홀로 고스란히 섬이 되었다
단감이 물러 홍시가 되고 가지 끝에서 쪼그라들고
옛날 그 아이 따라 굽이굽이 뱃길 산길
시설이 깨끗한 요양원으로 따라나선다
자주 찾아뵙겠다고, 콩가루 한 움큼 삼킨 목울대로
아이는 약속하지만
문밖 들썽거리는 바람처럼 이내 체념하듯
쌀밥 한입 욱여넣으며 손사래로
바쁜데 어여 가라네
_「돌아오지 않는 길」 전문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아내는
이사를 하고서도 꼭 필요한 것만 풀었다
굳은 입처럼 앙다문 보따리
다락이나 선반 구석구석 불만처럼 쌓아두었다
그리고 또 언제 떠날지 몰라
푼 짐들의 상자를 쉽게 버리지 않았다
늘 기찻길 옆이었다
꽃도 기적 소리에 피고 기적 소리에 졌다
낮은 처마 빛바랜 담 밑으로
연둣빛 애기 배추
우르르 땅 울리면 한낮의 햇살도 기울고
간고등어 굽는 냄새에
놀던 아이들이 돌아왔다
벚꽃 한 무더기씩 지는 아이들 웃음소리
기차는 떠나고 아이들은 컸다
아이들이 떠나고
기적 소리가 뜸해진 기찻길 옆
입냄새를 감추며 달빛에 젖은 밤꽃이
만날 듯 아스라이 닿아 있는 길 마중하듯
서리처럼 부스스 서 있다
_「기찻길 옆」 전문
뽀얗게 우러난 국물이
겨울달처럼 말갛다
염통처럼 벌름거리며 끓어오르던
깊은 관절과 힘줄과 뼈마디
녹아 흐물거릴 때까지 우려낸 국물
산동네 가슴 시리던 겨울달 같다
끓이고 또 끓이고 토막난 사골과 반골
동동거리고, 엎어지고 넘어지고 부딪치고
먼저 떠오르는 두터운 기름층
대국자로 걷어내고 또 걷어내고
어느덧 비릿한 냄새도 가시고
구수한 냄새가 난다
구수한 냄새가 난다 애꿎게도
골분이 다 빠져버린 뼈다귀는
스펀지처럼 수천 개의 구멍이 뚫리고
손으로 만지면 가루가 되어버리는
주방 뚝배기 같은 사내 가슴 속
묵묵히 겨울달 하나 또 진다
_「조리사 일기 4―겨울달」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