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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노란 택시를 타고 온 손님들
새우 양식장
영석이네
흔들리는 것들
화투점
다시 길 위로
산12번지 시민아파트
해방촌
지우
사회안전법
유령의 시간
에필로그

개정판 작가의 말 | 초판 작가의 말
저자 소개
저자 : 김이정
경북 안동 출생.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 소설집 『도둑게』 『그 남자의 방』 『네 눈물을 믿지 마』와 장편소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물속의 사막』 『유령의 시간』을 출간.
『유령의 시간』으로 제24회 대산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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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반복해서 벌어지고 있는 생의 함정들이 문득 저승인 듯 캄캄했다.
이 땅에선 영원한 죄인일 수밖에 없는가.”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이섭은 독립운동을 하던 숙부의 영향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하고 아내와 세 아이를 남한에 둔 채 월북한다. 북한의 피폐한 현실을 목도한 이섭은 다시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내려오지만 사라진 ‘빨갱이’ 남편 대신 젖먹이를 품에 안고 끌려갔다는 아내와 형에게 맡겨진 두 아들이 그를 찾아 북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내와 세 아이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일상마저 침탈하는 국가권력의 공포 속에서도 이섭은 다시 꾸린 가정만은 잃지 않겠다 다짐한다.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도 “가구와 책 카탈로그를 봉투 가득 들고 구두 밑창이 다 닳도록” 돌아다니는 그는 책임감 강하고 성실한 보통의 가장이었다. 하지만 ‘사회안전법’이라는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 앞에서 되살아나는 공포감에 그의 생은 무너지고 만다.

이섭과 새 가정을 꾸린 미자는 이섭을 만나기 전 허망하게 남편을 잃었다. 피란을 떠나기 전날 밤 남편이 탄피인 줄 알고 장난삼아 만지던 수류탄이 폭발하였고 남편은 새색시 눈앞에서 신혼방 바닥에 주검으로 내팽개쳐졌다. 죽은 남편의 시신을 체온이 식기도 전에 땅에 묻고 피란을 떠나야 했던 미자는 시부모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친정으로 돌아온다. 미자의 계모는 팔자 사나운 의붓딸을 폐기하듯 열일곱 살이나 차이 나는 이섭에게 보낸다. 이섭에게는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간첩이 되어서라도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기에 미자는 그의 처로 호적등본에 오르지 못한 채 네 아이를 낳아 기른다.

이섭이 새우양식장을 운영할 때 한동네에 살며 일을 도왔던 영석이네, 서순희는 정신병동에 입원한 남편 몫까지 혼자 짊어지고 두 아들을 키우며 살아간다. 월남전에 돈 벌러 갔던 영석의 아버지는 제대 날짜를 6개월 앞두고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고 귀국했다. 남편은 갓난아기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작전 이후 정신이 “잘못 끼워진 나무토막처럼 틀어지기” 시작했다. 영석의 엄마만 알아본 채 부모도 몰라보고 신음과 헛소리에 발작 증세까지 보이던 남편은 끝내 영석이네에게 시퍼런 낫을 들이대던 날 국군병원 폐쇄병동에 갇힌다.

채찍을 든 사내를 보며 이섭은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도대체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가졌던 인간과 저 채찍을 든 인간은 같은 종이란 말인가? 그들을 ‘인간’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불러야 한단 말인가.
이섭은 인간에 대한 환상이 무너져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극도의 공포가 몰려왔다. 채찍을 든 남자가 담뱃불을 붙였다. 거의 동시에 정수리로 채찍이 내리꽂혔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오줌보가 터져버렸다. 이섭은 바지가 젖어가는 것도 모른 채 사내의 다음 채찍이 날아올 동안의 정적에 질려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봉인된 기억들은 무덤을 파헤치기라도 한 듯 튀어나왔다. 그것들이 이 생에 다시 되풀이될 수도 있다는 것인가. 사회안전법은 5년 동안 인간이 될 수 없었던 이섭에게 어느 날 그곳으로 다시 처박힐 수도 있다는 협박이었다.
_「사회안전법」에서

직장을 구할 때마다 신원 조회에서 탈락하고 “철저히 봉쇄당한” “사지를 결박한 채 조금씩 숨통을” 조여오는 것 같은 공포감으로 일상조차 억압당한 이섭, 하늘의 시샘을 살 정도로 정이 좋았던 신혼의 남편을 잃고 “체온이 식지도 않은 사람 위로 흙을 덮을 땐” “같이 그 속으로 들어가고만 싶었”던 미자, 파월 장병들은 이미 베트남에서 철수를 하고 돌아왔는데도 의식의 동굴에 갇혀 “총을 들고 포탄에 살점이 튀는 밀림을 혼자 뛰어다니며 비명을” 지르는 영석의 아버지, “그건 꿈같은 얘기네. 자네는 인간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하나? 나는 인간은 아주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네”라며 참혹한 현실을 절망도 희망도 꿈꾸지 않고 냉소로 견뎌낸 이섭의 친구 최. 그들이 “창자의 내벽에 굵은소금을 박박 문질러대는 것도 같고 칼로 자근자근 저미는 것도 같은 통증”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내는 동안 그들의 국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했던 것일까.

“우리 시대 소중한 문학적 성취이다. (…) ‘인간의 시간’을 위한 새로운 공동성을 생산하는 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 한 인물을 통해 충분함의 윤리를 기반으로 하는 삶의 기쁨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상상하게 될 것이다.”
_고영직, 〈계간 자음과모음〉 2016년 봄호

망각과 무감의 시대에 다시 꺼내는 ‘분단문학’

문학평론가 고영직은 공위기(空位期)의 분단체제 속에서 “국민이라는 이름의 노예적 삶”을 산 “김이섭이라는 존재는, 역설적으로, 냉전시대 분단체제에서 자신만의 리듬과 진동(振動)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음을 증언하는 ‘증언자’”라고 말했다. 나아가 김이정의 소설 『유령의 시간』을 읽는다는 것은 “지금과는 다른 실재의 차원을 기도하는 데 있어서 문학이 맡아야 하는 책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국민국가의 존재와 상태에 대해 문학적 ‘증언’을 하는 것이 갖는 의미를 더 자주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

우리 사회에서 ‘북한’은 누군가에게는 단장(斷腸)의 슬픔으로, 누군가에게는 붉은 돼지로, 누군가에게는 그저 못사는 나라로, 또 매카시스트의 정당성을 위한 도구로 존재한다. 혐오든 그리움이든 통일이 되기 전까지 철조망 저쪽의 북한은 꾸준히 우리의 일상을 흔들 것이다. 38선에 철조망이 놓이는 순간 사람들 각자의 마음속에도 들어앉은 철조망은, 79년 동안 그랬듯이, 이쪽과 저쪽을 가를 것이다. 그렇기에 철조망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한 묶음으로 얽히지 못하고 “폐가에 버려진 항아리처럼” 고독했던 이섭을 통한 ‘증언’은 오늘도 유의미한 것이 아닐까.

작가 김이정은 2016년 대산문학상 수상 당시 “제 소설은 1970년대가 배경인데,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그때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거 아닌가 하는 기시감에 시달린다”고 말한 바 있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 희생된 사회주의자가 주인공인 내 소설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했는데 불행히도 분단과 역사의 폭력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분단을 다룬 여러 작품이 이어져서 분단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랐던 8년 전 작가의 기대는 그래서 오늘도 유효한 듯하다.

현재적 가치만 중요시하는 정보의 시대에 흐려진 역사의식의 자리에는 망각과 무감이 어떠한 불편함도 없이 들어앉았다. 그렇지만 반복되어서는 안 될 전쟁과 분단 76년이라는 유일의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위해 기억해야 하는 시간들이 있다. 이것이 전쟁과 분단의 실체를 ‘증언’해줄 ‘김이섭’이 다시 우리 곁에 놓인 이유이다.

· 이 책은 2015년에 출간된 『유령의 시간』(실천문학사 刊) 개정판입니다.
· [교유서가 다시, 소설] 시리즈는 비록 시장에서 외면받아 사라졌지만 눈 밝은 소수 독자 사이에서 회자되는 작품을 발굴하여 출간합니다. 오로지 눈앞을 향해 달리는 광속의 시대에, 어제의 향수와 오늘의 가치를 환기하는 밤하늘의 별과 같은 이야기의 시대를 복원하면서, 미래를 위해 숨을 고르는 여유를 되찾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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