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고대영시는 우리나라 영문학도들에게만 생소한 시문학이 아니다. 영어를 상용하는 문화권에서 태어나 살아온 사람들에게도 생소한 시문학일 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 영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쉽사리 다가갈 수 있는 문학세계가 아니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이 습득한 영어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독해가 불가능한 언어로 쓰인 문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영문학 사화집에 실려 있는 고대영어 문학작품들은 원전 그대로가 아니라 현대영어 번역으로 소개되고 있다. 흔히 ‘영시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14세기 시인 제프리 초써(Geoffrey Chaucer)의 작품들만 해도 중기영어(Middle English)에 대한 얼마간의 소양만 있으면 사전의 도움을 받아 그리 어렵지 않게 읽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고대영어는 어미변화가 심한 굴절어이고, 11세기 중엽에 있었던 ‘노먼 족의 정복(The Norman Conquest)’을 기점으로 영국에 유입된 당시의 프랑스어와 접목되기 이전에 영국 땅에서 사용되었던 옛 게르만어군의 한 분파로서, 이 언어를 별도로 공부하지 않고서는 읽어나갈 수 없는 고유의 문학전통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고대영시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현대영어 번역을 통해 그 내용을 대략 파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음악에서 원래의 악기로 연주해야 작곡자가 의도한 대로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대영시도 원시의 소리를 음미할 수 있어야 작품세계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문학 작품 사화집에 수록된 고대영시의 현대영어 번역본을 읽을 때마다 나는 원전이 주는 감흥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렇다면 왜 내가 고대영시를 우리말로 옮길 생각을 갖게 되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차피 번역을 통해 고대영시를 읽을 것이라면, 우리말보다야 원전을 낳은 문화권 전통에 서 있는 현대영어가 더 적합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곁들여 할 때, 그것은 타당한 물음이다. 그 물음이 원론적으로는 타당한 근거가 있는 것이지만, 실제로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상황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말로 나는 응답하겠다. 고대영시를 현대영어로 재현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산문으로 ‘뜻풀이’를 하는 데에 그치고는 한다. 그래서 영문학 작품 사화집들은 고대영시의 현대영어 산문번역을 싣는 경우가 많다. 한 예로, The Norton Anthology of English Literature는 오랫동안 톨보트 도날드슨(E. Talbot Donaldson)의
<베오울프>
산문번역을 실었다. 그러다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의 시인 셰이머스 히니(Seamus Heaney)가 한 ‘운문번역’으로 이를 대체하였고, 지금은 히니의
<베오울프>
번역을―그것이 마치 결정판이기라도 한 듯―많은 독자들이 이의없이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히니의
<베오울프>
번역을 몇 페이지 읽다가 그만두었다. 원시가 주는 감흥과 말의 음악이 전혀 전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히니의 애국애족의 마음이 대단한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그의 번역은 앵글로쌕슨 문학이 아니라 아일랜드의 민족문학이기라도 한 양, 아일랜드 문화전통과 관련된 요소와 아일랜드 말에서 유래한 어휘를 의식적으로 가미하였다는 인상이 짙기 때문이다.
고대영시의 운율은 우리 고전시가의 운율과 여러 면에서 유사성을 띤다는 사실은 우연치고는 너무도 절묘하다는 생각을 오래 가져왔다. 우리 고전시가를 소리 내어 읽으면, 한 행에 네 번의 소리때림이 규칙적으로 반복된다. 그리고 한 행은 각기 두 번의 소리때림이 좌우 대칭을 이루면서 그 중간에 짧은 호흡의 휴지(休止)를 갖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말은 자연스럽게 두운(頭韻)을 이루는 성향이 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관동별곡(關東別曲)?의 종결 부분은 다음과 같다.
송근(松根)을 / 베고 누워 // 풋잠을 / 얼핏 드니 //
꿈에 / 한 사람이 // 날다려 / 이른 말이 //
그대를 / 내 모르랴 // 상계(上界)의 / 진선(眞仙)이라 //
황정경(黃庭經) / 일자(一字)를 // 어찌 그릇 / 읽어 두고 //
인간(人間)에 / 내려와서 // 우리를 / 따르는다 //
적은 덧 / 가지 마오 // 이 술 한 잔(盞) / 먹어 보오 //
북두성(北斗星) / 기울여 // 창해수(滄海水) / 부어 내어 //
저 먹고 / 날 먹여늘 // 서너 잔(盞) / 기울이니 //
화풍(和風)이 / 습습(習習)하여 // 양액(兩腋)을 / 추켜 드니 //
구만리(九萬里) / 장공(長空)에 // 저기면 / 날리로다 //
이 술 / 가져다가 // 사해(四海)에 / 고루 나눠 //
억만(億萬) / 창생(蒼生)을 // 다 취(醉)케 / 만든 후(後)에 //
그제야 / 고쳐 만나 // 또 한 잔(盞) / 하잣고야 //
말 지자 / 학(鶴)을 타고 // 구공(九空)에 / 올라가니 //
공중(空中) / 옥소(玉簫) 소리 // 어제런가 / 그제런가 //
나도 / 잠을 깨어 // 바다를 / 굽어 보니 //
깊이를 / 모르거니 // 가인들 / 어찌 알리 //
명월(明月)이 / 천산만락(天山萬落)에 // 아니 비친 / 데 없다 //
고대영시에서도 기본이 되는 리듬은 한 행에 네 번의 소리때림을 반복하는 데에 있고, 프레드릭 클레이버(Frederick Klaeber)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고대영시 원문을 편집할 때 시각적으로 분명히 표시하여 왔듯이, 행 가운데에 잠시 호흡의 휴지(caesura)를 갖는데, 앞부분(‘on?verse’)과 뒷부분(‘off?verse’)이 균형 있게 대응한다. 또 고대영어는 작품을 쓰는 사람이 의식적으로 시도하지 않았더라도 언어 자체가 체질적으로 두운을 지향하는 성향을 보인다.
Þa ymbe hlæw riodan hildediore,
æþelinga bearn, ealra twelfe,
woldon [ceare] cwiðan ond kyning mænan,
wordgyd wrecan ond ymb w[er] sprecan;
eahtodan eorlscipe ond his ellenweorc
duguðum demdon, swa hit ged[efe] bið
þæt mon his winedryhten wordum herge,
ferhðum freoge, þonne he forð scile
of lichaman [læded] weorðan.
Swa begnornodon Geata leode
hlafordes [hr]yre, heorðgeneatas,
cwædon þæt he wære wyruldcyninga
manna mildest ond mon[ðw]ærust,
leodum liðost ond lofgeornost. (Beowulf, ll. 3169?3182)
[그리하여 전쟁에서 물러섬이 없던 무사들,
모두 열두 명의 혈통 자랑하는 전사들은
주군의 무덤 주위를 말을 타고 돌며 돌며
슬픔에 목이 메어 주군의 이름 부르더이다.
칭송하는 노래 지어 못내 잊을 주군의
절륜한 무용과 위업을 찬양하니,
때 되어 주군의 영혼이 육신을 떠날 제,
말로써 기리고 가슴으로 뜨거이 그리워함은
남자로 태어난 자 마땅히 할 도리인저.
기트 사람들은 슬퍼했소. 따스한 불을 함께 쪼이던
기억만 남기고 그네들 주군이 마침내 떠나갔음을.
그들은 말하기를, 세상을 다스린 모든 왕들 가운데
가장 따스하고 다정한 임금, 백성들에게 인자하고
누구보다 영광을 추구했던 분이었노라 하더이다.]
(
<베오울프>
3169?3182행)
두 시문학 전통에서 공통적으로 감지되는 운율의 특징―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네 번의 소리때림과 빈번하게 나타나는 두운―은, 두 언어가 문화적 배경이나 체질에 있어 아무런 공통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언어권을 넘나들며 ‘번역’이라는 문학행위를 시도해 보고 싶은 욕구를 갖도록 해 준다. 이는 외국문학을 공부한 사람이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며 문학적 도전에의 초대다.
이 책은 지금껏 내가 큰 즐거움을 느끼며 읽어 온 고대영시들을 나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 우리말로 전환하여 본 결과를 모은 것이다. ‘번역’이라는 문학행위는 원전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독자들에게 원전을 읽은 사람이 느낀 감흥을 전해 주고, 이를 함께 나누고 싶은 욕망에서 출발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일반 독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한평생을 외국문학을 공부하며 지내온 사람으로서, 후학들에게 얼마간의 도움이 될 수 있는 지침서를 남겨 주고 싶은 마음도 있다. 원전을 읽을 때 참고가 될 번역을 제공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평이한 읽을거리를 일반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도, 영문학 전공자들이 원전과 대조해 가며 읽어나갈 수 있는 번역본을 마련하는 것도 염두에 두었다. 따라서 나의 번역은 축어역에 가까우면서도 일반 독자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번역시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책은 모두 아홉 편의 고대영시를 담고 있다.
<베오울프>
는 고대영시를 대표하는 서사시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와
<오디쎄이>
,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드>
가 지중해 문화권이 낳은 대표적 서사시들이라면,
<베오울프>
는 북구의 게르만 문학전통의 한 면을 보여주는 유일한 고대영어 서사시이다. 따라서
<베오울프>
한 편만 담은 책을 내려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베오울프>
의 번역을 끝내고 나니, 내가 좋아하는 몇 편의 짧은 시들도 함께 소개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여덟 편의 시들을 함께 수록한다. 이른바 ‘극적 독백(Dramatic Monologue)’으로 분류되는 ‘방랑하는 사람’과 ‘바닷길 가는 사람,’ 종교적인 내용을 담은 ‘캐드몬의 찬가’와 ‘십자가의 환영,’ 작품의 일부분만 남아 있는 ‘폐허,’ 애가(哀歌)의 전형으로 알려진 ‘버림받은 자의 탄식,’ 그리고 전쟁시 ‘말돈 전투’와 ‘브루난부르흐 전투’가 그것들이다.
그러나 이 여덟 편의 시들은 별개의 작품들로 읽기보다는
<베오울프>
라는 서사시의 연장선상에서 읽을 때에 그 의미가 깊어진다. 고대영시 전체에 흐르는 우수에 찬 삶에 대한 상념, 운명에 대한 달관, 인생무상의 철리를 끌어안는 체념, 영원한 신의 섭리에 귀의함으로써 위안을 얻으려는 노력, 이 모든 것을 표출하면서 한 편 한 편이
<베오울프>
의 세계를 보완하고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나의 손에 들려있지는 않으나, 마음의 귀로 들을 수 있는 고대 음유시인의 하프 소리를 독자들이 나의 우리말 번역을 읽어나가는 도중에 간헐적으로 들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이 번역시집을 낸다.
베오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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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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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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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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