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끝까지 곁에 머무는 사랑, 그 시간의 기록
『고해의 세월』은 한 남편이 아내의 병상 곁을 지키며 써 내려간, 무려 3년 9개월의 간병 일기이다. 아내가 갑작스레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남편은 매일같이 병원을 찾았고, 코로나19로 면회조차 제한되던 시기에도 병원 문 앞에서 그녀를 위한 편지를 써 전달했다.
이 책은 단순한 일상의 기록이 아니다. 병상에 누운 아내 '영자'를 향한 애틋한 사랑, 말 대신 전하는 온기, 그리고 죽음을 앞둔 이와 이를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이 깊은 울림으로 담겨 있다.
노년의 외로움, 인간의 유한함, 그리고 사랑의 본질에 대해 독자 스스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이 책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넘어 ‘내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한 남편이 보여준 절절한 순애보이자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마주할 삶의 현실에 대한 조용하고 진실한 증언이다.
책 속에서
오늘 저녁에 영자를 만날 때 울지 않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렇게라도 살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좋아지겠지. 언제나 밝은 면만 보자는 깨달음에 감사한다. 저녁에 면회를 했다. 걱정과는 달리 영자 얼굴은 좋았고, 표정은 조용하면서 평화로웠다. 꽃과 야채수, 새로 산 조끼를 안겨주었더니 좋아라 한다. 오늘은 하루종일 우울했는데, 면회를 하고 나니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도 꽃을 들고 휠체어에 앉아있는 처량한 모습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p. 10, 1부 ‘2021년 12월 11일’
요양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영자가 틀니를 빼서 던져버리고, 마스크도 벗어버린다는 것이다. 계속 끼고 있으니 불편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벗어 던진다는 것은 여간 걱정되는 일이 아니다. 또 마음이 아프다. 병원 의사를 만나봐야겠다.
『스님은 아직도 사춘기』라는 명진 스님의 신간을 읽었다. 출가자의 삶도 삶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종교는 도피이자 기만이다. 몸부림쳐도 유기체의 숙명은 어쩔 수 없다.
-p. 16, 1부 ‘2022년 1월 23일’
요양병원 의사가 영자의 의식수준이 유치원생 정도라고 말했다. 많이 회복된 것이다. 간식을 들고 병동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운동하고 병실로 돌아가는 영자를 조우했다. 너무 반가워 눈물이 핑 돌았다. 휠체어에 앉은 영자 얼굴에도 반가움이 솟아났다. 엘리베이터를 몇 번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우리는 짧은 만남을 이어갔다. 영자의 표정과 눈동자가 거의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놀라운 진전이다. 만나기 어려우니 자꾸 편지라도 써줘야지.
-p. 30, 1부 ‘2022년 4월 27일’
꽃봉오리는 귀엽다. 꽃은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시든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꽃은 시든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망각으로 들어가는 죽음은 슬퍼할 일이 아니다. 망각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자식들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점점 더 그럴 것이다. 엄마는 병원에 있고, 아빠는 아프니 부담이 되겠지. 여기서 감사할 건덕지는 뭘까? 신록의 계절에 날씨도 좋은데. 공원 벤치에 앉아 사색을 즐길 수 있는 것,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영자와 통화를 했다. 원망이 가득한 말투다. 병원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으니 데리고 나가라는 것이다. 가슴이 아프다. 누가 돌볼 수 있나. 눈물이 절로 난다. 정신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는 것이 이런 고민을 안겨준다.
-p. 31, 1부 ‘2022년 5월 6일’
영자는 한없이 불쌍하고, 나는 여기저기가 아프다. 혼자 가만히 집에 있으면 서글퍼진다. 의미 없는 날이 오고 또 번개같이 지나간다.
석가나 예수나 소크라테스나 톨스토이나 모두 그렇게 아웅대다 떠나갔다. 죽은 자는 망각으로 사라졌는데, 산 자들이 온갖 의미를 붙여 추모한다. 죽은 자는 그걸 알지 못한다. 生은 空이다. 그러나 요양원에 있는 영자는 실존이다. 나도 실존이다. 그래서 空과 영자와 내가 뒤엉켜 고뇌한다.
-p. 62, 2부 ‘2022년 11월 29일’
영자와 함께 있는 시간이 가장 좋다. 위문을 하는 게 아니라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내면에 잔잔히 흐르는 슬픔이 언제나 나를 눈물 짓게 한다. 영자는 이제 그곳 생활에 익숙해진 것 같다. 그전에는 바깥에 한 번 나오면 안 들어가려 했는데, 이제는 좀 피곤하면 들어가자고 한다. 체념을 한 건가.
오늘도 마고커피에서 이런저런 것 먹으며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요양원에 들어와 같이 살까, 하고 물었더니 영자는 픽 웃었다.
-p. 81, 2부 ‘2023년 5월 9일’
당신 사랑한다고 전화로 말했더니 영자가 겨우겨우 목소리를 내어 하는 말이 나도 사랑해란다. 왈칵 눈물이 난다.
-p. 105, 2부 ‘2023년 11월 13일’
영자는 시종일관 무표정했다. 간단한 말도 못 한다. 다리를 주물러 주니 시원하다는 표정이다. 그래서 시원하다고 말해보라고 했더니, 입만 오물거릴 뿐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는다. 모깃소리처럼 작은 소리를 겨우 내뱉기는 하는데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내가 암에 걸린 것 같다고 말해도 표정이 없다. 아마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는 것 같다. 그래도 키위 하나와 바나나 하나를 맛있게 먹는다.
-p. 107, 2부 ‘2023년 11월 25일’
오늘 과일을 먹여주면서 많이 울었다. 음식이 자꾸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흡사 두 살배기 어린이에게 먹이듯 얇게 썰어서 주는데도 제대로 씹질 못한다.
한없는 연민에 삶의 허망함이 마구 밀려와 나는 눈물 콧물을 가눌 수가 없다. 무표정한 영자는 내가 왜 우는지를 알까. 삼 년이란 세월, 숱한 고통 속에서도 영자는 아직 살아 있다. 나도 계속 여기저기 아프니 누가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
-p. 142, 2부 ‘2024년 10월 14일’
어제 영자가 입원했다. 영자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고개를 가누지도 못한다. 오전에 파티마병원 응급실에 갔는데 밤늦게서야 겨우 병실을 구할 수 있었다. 현정이가 휴무일이라 함께했다. 나는 오후 늦게 현정이와 교대하고 집에 돌아왔다. 현정이가 하루 12만 원짜리 간병인을 구했다. 영자는 폐렴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몇 달 전부터 잔기침을 했는데, 그걸 간과했나 보다.
오늘 새벽에 요양원 주변의 산책길을 생각하며 울었다. 그때가 그래도 행복했다. 다시 그렇게 산책을 할 수 있으려나? 오늘 오전에는 병원에 가져갈 물건들을 챙겼다.
-p. 154, 3부 ‘2025년 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