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시인의 말
이제, 당신의 침묵을 베껴 써도 되겠습니까
2025년 10월
김현주
책 속에서
꽃피는 동안만 풍경이 되는 동네,
지상에 세 들어 살다 보면 도장 찍을 일이 참 많습니다,
쪽, 쪽, 쪽, 오늘은 쪽수가 많군요
이쪽저쪽으로 날아다니는 것은 벌들의 오랜 습성이라,
연분홍 새 전단지가 봄바람에 휘날리는
춘화(春畵) 같은 골목은 한창 성업 중입니다
한 잎 지고 나면 다시 한 잎이 돋는 목련의 직거래,
이 봄을 담보로 너의 새 입술을 대출받을 수 있을까
마지막 불꽃이 튀듯 쪽, 쪽, 쪽,
만화방창에 걸려든 벌 떼들이 진땀을 흘리며 고쳐 쓰는
불온한 문서, 양쪽에 서명날인만 잘하면
이 봄도 무사할 것 같습니다만 날인하지 않는다 하여
꽃피는 일을 주저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노리개를 반쪽으로 갈라 증표로 쓰듯이
영혼까지 끌어 1,139개의 깡통에 불도장을 찍듯
아으, 궁창에 가득한 왕들
깜박 졸다 펴본 뜨겁던 혀들의 저 감각적 일치
몸으로 간음한 저들의 죄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지만
입으로 간인(間印)한 저들의 죄는 다시 용서할 수 없지만
도홧빛 혀 사이에 끼어 까맣게 타 죽어버린 벌새처럼
반지하 창틀에 끼어
울고 있는 봄비,
첫 쪽을 넘겼을 뿐인데 붉은 입술을 다 써버렸습니다.
--- 「목련빌라」 중에서
탕탕, 기습작전처럼 바람은 세차게 분다
무너진 담장에 깃든 찌르레기가 운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부적처럼 움켜쥔
저 울음은 난파선처럼 내게로 떠밀려온다
지옥에 가깝게 재생되는 공중파 화면 속, 캄캄한 복도 끝에서
창밖을 내다보던 아이, 핏빛 태양은 까치발을 하면 닿을 듯
까만 씨앗으로 여물어지던 정수리가 뜨거웠다
너 가짜야, 진짜야, 읍내 이발소나 화장실에 걸린 해바라기 그림이
진품일 리는 없다, 공습경보를 따라 흔들리는
폐허의 마른 줄기, 마른 지푸라기처럼 우는 핏덩이를 입에 문
저 새는 어느 영생을 찾아 헤매나,
탕탕, 전쟁놀이는 열방의 패권과 다툰다
파도에 떠밀려 온 갓난아이 울음은 손바닥만 한 방패,
저 울음은 어느 날 갑자기 커진 것 아니다 아이가 늙는다고 소멸될 것이 아니다
신들의 떼창이 진흙처럼 밟히는 저 가자지구
공중 투하된 자비의 만나는 주방의 홀로코스트, 펄펄 끓는
냄비 손잡이를 살짝 놓친 0.3초의 순간, 쉿, 소리에 놀라
얼른 귓불을 만졌을 앳된 소년의 죽음에는
노란 꽃받침이 없다,
불타는 증오를
한 잎 한 잎 떼어버린 듯
차가운 아이 손을 움켜쥔 아빠의 울음은 전신화상으로 쓰리다
눈을 크게 떠도 보이지 않는 슬픔의 여백,
할 수 없이, 불타는 지구는
지금 검은 해바라기를 들고 전전긍긍할 수밖에.
--- 「해바라기 소년」 중에서
예쁜 종 모양의 상록수, 스파티필룸,
뭉치듯 흩어지다가 마침내 꽃들이 핀다
운신할 공간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가지를 치다가 1cm만 더 밑으로 허리가 잘렸더라면 아기집을 잃을 뻔했는데 난산인 듯 하얀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상처의 꽃, 깨우침이 눈부시다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느냐고,
여긴 꽃길이 아니라고, 선택조차 버거운 지하 방
홀로 험한 시절을 엿본 듯,
하늘을 믿고, 땅을 믿고, 은혜의 단비라는 말을 믿고 제 살을 뜯어 먹이며 떠내려가는 우렁각시의 심정을 지상의 사람들은 알기나 할까
더위도 잠시 휴전을 알리는 듯
7월도 끝 무렵
인고의 원칙을 지킨, 정신의 무늬
기운 햇살 한 꼭지 지하로 내려와 분만촉진제라도 놓는지
쉿, 숨죽인 문밖
오메, 우리 어매, 시 낳고 계셨네!
책상다리로 끙끙 앓고 있는 여든의 채순 여사,
모진 삶의 품격이 여기에 있었다는 듯
밤공기를 뒤흔드는 만삭의 붉은 시편들
당신을 오래 읽다 보면,
어떤 것들은 맑은 영혼을 갖게 돼, 그건 아마
생명의 소멸에 대한 암시이기도 해서 끝물인 내 몸에서도
한 움큼의 마른 이슬이 뚝뚝 진다.
--- 「끝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