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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세상이 고소해지려면 더 오래 볶아야 하는데 벌써 새까맣게 탄다
방아깨비 11
거룩한 파리 12
메뚜기볶음 13
노루표 페인트 14
스파이더맨 15
농게 16
민달팽이 18
말표 구두약 20
꼽등이 22
동물 재배용 비닐하우스 24
소금쟁이 26
사마귀 28
기생충 30
노린재 32
개미구멍 34
반듯한 개미 36

제2부 나는 소화되지 않는 어떤 이름을 쉬지 않고 삼키고 뱉는다
음소거 39
근면한 모기 40
신림동 42
지구를 굴리는 쇠똥구리 44
물방개 46
땅거미 48
인간 채집 50
동물 채집 메모장 52
칠성무당벌레 54
돈벌레 56
바퀴 58
뱀 60
오징어 62
늑대 64
나방 66

제3부 두드리면 조금 가벼워지는 슬픔이 납작해지고 있다
용접봉 69
망루 70
울음을 망치질하다 72
컨베이어 74
압력계 76
되새김질―어느노동자의분신 78
전태일과의 한 끼 80
전기공 82
영등포 표류기 84
백혈병 86
망월동 88
전봉준 마지막 길 90
맥도날드 할머니 92
못 94
비정규직 96
거리의 야옹 97

제4부 아무리 세게 마음을 잠가도 새는 게 많았다
오늘의 날씨 103
마두금 104
손목시계―우크라이나 106
핼러윈 108
1987 110
팽목항 크리스마스 112
굴레 113
차이와 사이 114
김일수 116
13월 118
지문 120
나의 아저씨―이선균 122
누설 124
중독 125

해설 이경수 바닥을 기는 곤충의 생태학 127
저자 소개
저자 : 손석호
경상북도 영주에서 태어났다. 1994년 공단문학상, 2016년 [주변인과 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나는 불타고 있다] [스파이더맨]을 썼다. 2025년 제1회 무등문학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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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터널 끝이 보이지만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그냥 여기 머물래요”. 출구 없는 현실에서 오랜 기다림 끝에 출구를 발견하고도 그대로 주저앉겠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변하지 않는 현실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출구는 허상일 뿐이라는 것일까? 출구는 개인이 요행으로 얻는 기회의 문제가 아니며, 개인적인 해결책은 우리 시대의 구조적이고 억압적인 폭정에 맞서는 “정직한 굴종”의 태도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일까? 또는 어제보다 더 높아진 계단 앞에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저지대의 삶에 배인 굴종적 습성으로 빛을 피해 아래로 기어드는 생리를 가진 벌레가 되어 버렸기 때문인 걸까?(?기생충?) 이 시집 전반은 이 세 가지 질문이 섞이고 변주되고 반복되면서 우리 시대를 바닥까지 해부해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시집에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하는 벌레는 카프카식 변신이라기보다 우리 시대를 해부하면서 발견되는 병리적 증후에 대한 명명에 가깝다. ‘방아깨비’처럼 제자리에서 반복적으로 뛰면서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청년 세대, 높은 교육을 받고서도 ‘거미’처럼 빌딩에서 줄을 타야 하는 현실, ‘농게’가 팔을 버리듯이 컨베이어에 팔을 내주는 일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은유는 은유가 아니라 직유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인 사십 대의 사망 원인 1위가 암이 아니라 자살이라고 하는 통계가 말해 주듯 극심한 경쟁 체제는 인간적 존엄과 사회적 존중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우리 사회가 ‘공정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내면화하고 스스로를 착취하고 자폐적 방어선을 치고 자기 손으로 출구를 닫아 버리게 만든다. 내면과 외부는 분리되지 않는다. 따라서 시인은 내면을 깊이 응시하는 것이 현실과 맞서는 것이라는 듯 시를 막다른 곳까지 끌고 간다. 시인이 쉽게 정의와 공동선을 희망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 시가 응시해야 할 가장 정직한 자리에 이 시집이 놓여 있는 게 아닐까?
―백무산 시인

시인의 말

새벽까지 별을 가리킨다
오늘 밤에도
손목에서 거미줄은 발사되지 않는다

늦잠 속
슬픈 곤충이 기어다닌다

책 속에서

<방아깨비>

펄쩍펄쩍 아무리 뛰어도 그 자리가 그 자리 지구가 발목을 꽉 잡고 있으니 꼬꾸라지지 않는다 뒤뚱뒤뚱 일어서고 걷고 뛰고 멈췄다가 앉고 눕고 벌떡벌떡 다시 일어서고 걷고 뛰고 멈췄다가 눕는다 뒤적뒤적 보지 말자 듣지 말자 냄새 맡지 말자 맛보지 말자 만지지 말자 혹 보이고 들리고 냄새나고 먹고 만지게 되더라도 느끼지 말자 어기적어기적 출근하자 30분 일찍 출근하자 마을버스 타고 전철로 갈아타고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내리자마자 뛰자 눈 부릅뜨고 허벅지 꼬집으며 일하자 쓱싹쓱싹 쉬지 말자 쉬더라도 실적을 잊지 말자 퇴근 말자 퇴근하더라도 야근하자 재깍재깍 사랑하지 말자 사랑하더라도 결혼하지 말자 결혼하더라도 섹스하지 말자 질금질금 섹스하더라도 아이 낳지 말자 오늘을 간신히 찧었는데 쿵덕쿵덕 내일 때문에 잠은 오지 않고 멈추면 죽을 것 같고 버석버석 창밖 달 속에 토끼가 방아를 찧고 내 심장이 방아를 찧고 말똥말똥

<스파이더맨>

나는 도무지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 악의 꽃의 어느 페이지에 손가락을 꽂아 두고 있었고 형은 대자보를 붙이고 있었는데 잠자리가 우리의 여름방학처럼 거미줄에 달라붙어 퍼덕이고 있었어

형은 잠자릴 떼어 내 날려 보내며 말했지 겹겹이 둥글게 갇힌 과녁처럼 거미줄의 끈끈한 가로줄은 위험해 거미는 위험할 때 끈끈이 없는 세로줄을 타고 잽싸게 땅바닥으로 도망친대 거미도 가로줄엔 붙으니까

즐겁지는 않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거미줄보다 낮은 곳에 살고 있지 그렇다고 절대로 기어다니지는 않아 주로 걷는 척 뛰어다니지 높은 곳은 쳐다보지 않아서 줄이나 빽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어

십 년 만에 만난 형은 이제 줄 타며 산다고 한다 손목에서 거미줄이 나오지 않아 한 뭉치의 세로줄을 둘러매고 다니며 공중에서 세로줄을 타고 땅바닥으로 도망치며 산다고, 이십 층 이상 올라가면 일당이 십만 원 올라간다고

<울음을 망치질하다>

평화시장 뒷골목을 헤매다가 숨찬 바람
창신동 오르막 허름한 골목에서 주저앉고
뒤따라온 늙은 아비의 걸음에 술 냄새가 났다
지난 한 달을 납품하고 돌아온 오른쪽 어깨는
여전히 무언가 매달려 있어
비탈보다 더 비탈져 있고

탁. 탁. 탁.
고무망치 소리
수척한 골목을 깨우면
길 건너 수선집 재봉틀이 촘촘하게 오늘을 꿰매고
심술궂은 오토바이 수시로 찾아와 시간을 뜯어 놓는다
좀체 풀릴 기미 없는 영하의 담벼락에 그려진 복사꽃
돌아올 수 없는 자가 두고 간 봄처럼
일 년 내내 피어 있고

몸뚱이만 가지고 태어나서
무언가 담을 수 있는 가방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며
연신 가죽을 자르고 두드리고 꿰맨다
매일 하는 일이지만, 삶처럼
칼끝은 언제나 약한 자를 겨누고 있어
내피까지 푹 찢어지지 않으려면
손가락도 부릅떠야 한다

폐쇄된 공장에 설치한 바리케이드도 망루도
숨겨 주거나 지켜 줄 가방은 될 수 없었다
지난밤 들소 떼 울음소리 속
죽은 아들의 절규가 섞여 있었을까
새벽부터 소가죽을 넓게 자르고, 이제라도
아들을 숨기려는지 주머니 깊은 가방을 만든다

눈금자를 아무도 모를 세상 깊숙이 밀어 넣고
견뎌 온 거리와 남아 있는 거리를 재단하고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의 눈금이 뭉개질 때까지
울음을 망치질한다
양각이 음각으로
음각이 마음속 문신으로 새겨지고
두드리면 조금 가벼워지는 슬픔이 납작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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