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시인의 말
하늘에서 탄이 쏟아지는 마을 도계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시커먼 흥전항 굴속으로 출근하시고
엄마는 마교리와 흥전리 철로를 따라
낙탄을 주워 이고 오셨습니다.
아버지가 광부여서 우리 가족은 탄광촌에서 살았고,
가난하여 불편하기는 했지만
한 번도 불행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두 칸짜리 광산 사택은 따뜻한 보금자리였고,
두 분은 태백산맥처럼 굳건했으니까요.
이제는 저도 두 아이를 키우며 출근합니다.
언제나 다정했던 부모님을 떠올리면,
나는 무서운 게 없는 다이너마이트를 든 소녀가 됩니다.
추천사
눈을 가만 감으면 석탄에서 나온, “눈이 초롱한 소녀”(「봉화」)가 보인다. 가난했지만 나눌 수 있었던 두 칸짜리 광산 사택 5호 방, 산비탈 이웃들에게 김장김치와 동지 팥죽을 들고 “씩씩거리며 씩씩하게”(「서울 아이」) 오르내리는 소녀의 봉숭아 꽃물 들인 손톱도 보인다.
시집을 읽는 내내, 한 시절 국가 경제의 동맥이었건만 이제는 교과서 밖 다른 세계가 되어 버린 ‘탄광 말’에 서린 뭉클한 기억과 경험 들이 애틋한 울림으로 겹쳐 온다. 세상에는 여전히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가는”(「시인의 산문」)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까.
식어 가는 세상에서 끝내는 “불”이 되어 태백산 천제단의 “봉화”로, “꽃밭”(「봉화」)으로 피어나겠다는 소녀의 꿈은 굽이굽이 지나온 삶의 곡절을 따라 더없이 당차고 애잔하다. 급기야 세상의 낮은 곳에서 여리고 작은 것들을 품어 내는 따듯한 위로와 연민으로 시의 씨앗을 싹 틔워 시집을 읽는 저마다의 가슴속에 민들레 홀씨 되어 훨훨 퍼트려지리라 믿는다.
책 속에서
아버지 해고당하고
광부 사택에서 이사 나가던 날
문짝 하나 떨어져 나간 장롱 한편
켜켜이 쌓인
누런 월급봉투와
주택 복권을 보았지
내가 힘들 때마다 내리는
함박눈
창을 지우고
내 가슴에 쌓이는
누런 월급봉투들
녹지 않는 그날의 함박눈
―「함박눈」 전문
세상은 식어 가지만
우리는 불이 될 거예요
태백산으로 올라
천제단에 봉화가 오르면
온 나라가 빨갛게 피어나지요
천지가 꽃밭이 될 거예요
―「봉화」 부분
그러다 선생님이 내게 물으셨다
넌 왜 연탄이라고 했니?
죽어서도 빙판길 덮는
연탄처럼 타오르고 싶어요
―「장래 희망」 부분
이유도 없이 일찍 가라고 할 때
우리는 그 이유를 안다
선생님은 우셨고, 우리들도 따라 울었다
(…)
조등 단 대문 앞
삼베옷 입고 서 있는 친구
울지도 웃지도 않던
처음 보는 얼굴이 너무 낯설어 슬펐던 날
―「이른 하교」 부분
아픈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 따위 받고 싶지 않아
방학만 기다렸다
―「사랑의 매」 부분
첫눈은 멀었고 첫사랑은 시작도 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되었다
―「첫사랑」 부분
첫날 잠을 자려 누웠지만
잠은 안 오고
방바닥 아래에선 쾅쾅 소리가 들렸다
무서워 이불을 똘똘 말다 깬 아침
갱도에서 다이너마이트 터트리는 소리라 했다
(…)
언젠가 나도 어른이 되면
세상 어둠 깨는
다이너마이트 하나 들겠다
다짐했다
―「다이너마이트를 든 소녀」 부분
선생님도 엄마 있어요?
어디 있어요?
(…)
천장은 위험하니
어서 내려오시라 하세요
내려와서 얼른
아픈 사람 안아 달라 하세요
―「천장」 부분
―한명숙 (전국학교도서관모임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