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나는 7년 동안 일곱 명의 아빠를 둔 적이 있다.
이 책은 그 7년간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만들어낸 거라 생각되는 면도 있겠지만,
모두 사실이라 믿어도 좋다.
1983년 크리스마스.
스웨덴의 시골, 숲에 둘러싸인 집에서 한 여자가 얻어 맞았다.
그녀는 일곱 살 아들에게 자신도 몰래 비밀을 내뱉는다.
“저 사람은 너의 아빠가 아니야”
이제 7살이 된 소년 안드레브 (작가 이름)는 아빠라 불러온 사람이 진짜 아빠가 아닌 걸 알게 됐다. 그럼 진짜 아빠는 어디에 있는 걸까?
엄마의 대답으론 진짜 아빠는 아주 먼 나라에 살고 있고,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다고 했다. 인디언처럼 긴 머리라고 했다. 아빠를 상상하면서 소년의 마음은 들뜨게 된다. 이건 정말이지, 지금까지 들어본 얘기 중에 가장 멋진 이야기 같았다. 마치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아빠가 머나먼 왕국의 왕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언젠가는 아빠가 사람을 보내 소년을 찾으러 올 것만 같았다. 소년은 들뜬 마음으로 그렇게 믿어 보았지만, 그 이후로도 새로운 아빠만 등장했을 뿐, 진짜 아빠는 나타나지 않았다.
작품은 일곱 살 소년이 7년이라는 세월 동안 일곱 번이나 아빠가 바뀌는 상황을 겪으면서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는 때론 동화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현실을 필터링하며,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고 끝나는지 그려내고, 80년대 가부장제에서 남성의 폭력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시기를 그려내고 있다.
7년 만에 일곱 번이나 아빠가 바뀐다는 과장되고 우스꽝스런 설정을 통해, 작가는 진짜가 아닌 아빠들에 관한 이야기, 결국 모든 남성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소년의 눈으로 어른들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어서
마치 성인동화처럼 읽히는 순수한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소년의 눈을 통해 독자는 함께 질문하고 생각하게 된다.
정신 없이 웃게 만들면서도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다.
옮긴이의 말
이 작품의 스웨덴 원제는 『 Javla karlar』, 직역하면 ‘빌어먹을 남자들’이다. 작중 화자가 아빠라고 불러야 하나 고민했던, 그의 유년을 스쳐 간 남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화자의 어머니는 절친한 친구 ‘작은 구름’과 함께 그 한마디를 한탄처럼 주고받는다. 학대에 지친 여자들이 공유하는 연대와 공감의 언어다.
소년은 아빠라는 존재가 언제 시작되고 끝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이 폭풍우나 성장통처럼 불쑥 찾아와 삶을 휩쓸고 지나 가는 것임은 안다. 막을 방법은 없다. 옷깃을 단단히 여미거나 이를 악물고 견뎌야 한다. 결국은 지나가기 마련이니까.
역기능 가정에서 자란 시절의 이야기임에도 화자의 목소리는 어둡거나 무겁지 않다. 비극은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묘사되고, 두려움과 슬픔의 자리에 아이러니와 유머가 스며든다. 잊고 싶은 장면들은 소년의 뇌리에 선명히 각인되었지만, 그것이 상흔으로만 남 지는 않았다. 그는 자라면서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웃는 것이 삶의 요령임을 터득한다. 그리고 훗날, 과거의 ‘빌어먹을 남자들’을 품위 있게 조롱하고 위트 있게 연민한다.
진짜 아빠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 소년은 설레는 마음으로 동화 속 모험을 꿈꾼다. 그러나 머나먼 나라의 인디언이 벨기에의 택시 운전기사로 변모하는 과정은 조금도 극적이지 않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어른이 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크고 작은 실망을 거치며 서서히 환상에서 깨어나 다소 지루하고 너절한 현실을 받아들인다. 소년은 마침내 생애 처음으로 진짜 아빠를 만나러 가지만, 더 이상 아버지라는 존재를 갈망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유년을 닫고 새로운 장으로 나아간다.
기억이란 참 이상하다. 평생을 좌우할 사건이 안개처럼 흐릿하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끊겨버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어느 여름날 발바닥에 닿았던 풀잎의 서늘한 감촉이나, 낡은 가구에서 페인트를 벗겨낼 때의 냄새 같은 사소한 기억은 몇십 년이 지나서도 또렷이 떠오른다. 작가는 그 기억의 조각들을 짜기워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그 풍경들은 때로 추하고 비참하지만, 멀리 서 바라보면 꽤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다. 어린 시절의 감정적 진실은 휘발되지 않고, 창작자의 언어를 통해 마법 같은 울림을 자아 낸다. 진실의 아우라가 물씬 느껴지는 이야기 앞에서 우리는 기억 속에 묻어둔 좌절과 실수, 수치의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려 보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안드레브 발덴은 이 데뷔작으로 스웨덴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어거스트 상을 받았다. 초로에 접어든 그가 작가의 길을 걷기 위해 끝내 이 이야기를 써낼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그것은 용감하고 해방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각자의 이 야기의 주연인 동시에 서로의 이야기에서 조연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숨기고 싶었을지 모를 과거를 드러내야 했던 어머니 와는 부디 충분한 이해와 합의가 있었기를 바란다.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사랑이 넘쳤지만, 그 사랑을 줄 상대를 기막히게 잘못 고르곤 했습니다.” 신랄한 말이지만, 비난이나 원망의 기색은 없다. 그는 어머니가 삶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알고 있으며, 독자에게도 그 진실을 담담하게 전한다.
1990년 여름, 스웨덴의 한 속성 없는 소년이 어린 시절에 종언을 고한다. 그로부터 약 35년이 지나 그의 회고는 약 8,000킬로미터 떨어진 한국의 독자들에게 가 닿아, 저마다의 가슴 속에 잠자던 유년의 상흔과 환희를 흔들어 깨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저 한 번역자가 긴 작업을 갈무리하고 여운을 곱씹고 있을 뿐이다. 기막힌 일이다. 이 세상 누구나 지갑 속 머리카락 한줌 같은 비밀스러운 기억들을 품고 저마다의 생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2026년 봄, 이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