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철수 시인의 새 시집 『깨진 귀를 반성하다』에는 삶을 관조하는 낮은 시선이 주조음으로 깔려 있다. 시인의 목소리는 높지 않다. 도리어 듣는 귀를 연마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대목이 인상 깊게 나타난다. 이를 일러 해설을 쓴 황규관 시인은 “존재의 음성을 듣는 시‘라고 이 시집의 특징을 요약했는데, 이는 단지 제목에 ’귀‘가 들어가서만이 아니다. 시인은 바깥의 목소리만이 아니라 자기 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 역량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방식도 의지의 힘을 발휘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좀 더 낮추는 방식을 통해서다. 듣는 귀에 대한 몇 가지 시적 구현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그날 밤 아버지가 물었다
방에서 떨어진 동전 못 봤니?
나는 작은 목소리로 모른다고 했다
그날처럼 내 목소리가 내 안에서
크게 울린 적이 없다
_「나는 모른다고 했다」 부분
풀벌레 소리에
귀가 깨끗해진다
내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곳곳으로부터
또록또록 들리는 소리가
무량한 어둠의 넓이를 만든다
소리 속에 소리가 있고
그 소리 속에 또 소리가 있어
무량한 어둠의 깊이를 만든다
_「풀벌레 소리에 귀의하는 밤」 부분
「나는 모른다고 했다」에서는 어릴 적에 아버지가 흘린 동전으로 만화를 보고 크림빵을 사 먹은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그때 “내 안”의 “내 목소리”를 들었던 때를 쓰고 있고, 「풀벌레 소리에 귀의하는 밤」에서는 어느 날 밤에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무량한 어둠의 깊이”를 느끼는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인간의 인식은 보기(seeing)에 관계되어 있는데 ’듣기‘가 빠진 ‘보기’가 인식을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듣기’는 언제나 ‘보기’에 비해 그 존재론적 위치가 밀려나 있었다. 따라서 역사는 지금껏 보이는 것을 지배하려고만 했지 들리는 것에 끌려가 본 적이 없다. ‘듣기’는 한편으로는 순명(順命)이면서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다. 「이순(耳順)」이라는 작품에서 “오늘 듣고 본 좋은 것들을/ 그대로 이 못난 항아리에 담고/ 잠을 청한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시는 존재하는 것들을 보존하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구체적 삶에서는 “성찬 것”을 “시든 것”에서 떼어내야 하는 선별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것은 폭력적 개입이 아니다. “성찬 것”의 존재를 지키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