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시집의 첫머리에 놓인 「나무가 사는 법」은 한길수 시 세계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거목이 세월을 지나온 증인이라면/ 흩날리는 낙엽은 계절을 변호하는 몸짓입니다”. 거목과 낙엽은 모두 시간의 일부이지만 시인은 둘을 같은 방식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거목은 지나온 시간을 품은 존재이고 낙엽은 떠나가는 시간을 드러내는 존재다. 한길수 시인의 시선은 이처럼 하나로 보이는 풍경 속에서도 서로 다른 시간의 결을 읽어낸다. 자연은 그에게 존재의 방식을 보여 주는 언어이다.
이러한 시선은 시집 전반에 걸쳐 반복된다. 「모르고 산다는 것」에서 나무는 잘린 뒤에야 나이를 알 수 있는 존재로 등장하고, 「물의 근육」에서는 혹한의 계곡물이 인간 내면의 근육을 길러 주는 스승으로 변한다. 「간벌」에서는 잘려 나간 나무가 훗날 서로를 따뜻하게 품는 장작이 되고, 「낙엽」에서는 떨어지는 잎이 섭리를 깨달은 노승처럼 읽힌다. 자연은 삶의 원리를 가르치는 존재다.
그러나 이 시집을 자연 시집으로 읽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자연은 시인의 사유가 머무는 장소일 뿐, 그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시간과 기억, 그리고 그리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길수 시인의 시에서 그리움은 상실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떠난 것들을 다시 현재로 불러들이는 힘이다. 「초승달」의 화자는 달빛 속에서 떠난 이를 떠올리고, 「앞 잔치」에서는 먼저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나비의 몸짓 속에서 다시 만난다. 「북한강에서」는 부모 세대의 가난과 노동을 현재의 기억 속으로 불러오며 존경과 애도의 언어로 바꾸어 놓는다.
특히 「내 발자국 위에 그대 발자국 덮으며」는 이러한 시집의 핵심 정서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사랑이라 썼다가 지우고/ 행복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리움이라 썼다가는 차마 지우지 못하니”. 사랑과 행복은 지울 수 있었지만 그리움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감정이 아니라 현재를 구성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첫눈 위에 남겨진 발자국을 따라 다시 오라고 부른다. 그리움은 다시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통로가 된다.
이러한 특징은 시집의 제목과도 깊이 연결된다. 『물결은 보내고 나는 남아서』라는 제목은 시간에 대한 시인의 태도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세상 모든 것은 물결처럼 흘러간다. 사람도 떠나고 계절도 지나가며 젊음 또한 사라진다. 그러나 시인은 떠난 것을 마냥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남아 있는 자의 자리에서 그것들을 오래 바라본다.
그 상징적 형상이 「조약돌」이다. “물결은 보내고 나는 남아서/ 뜨겁게, 뜨겁게/ 지난날을 굽어보는 것이냐”. 조약돌은 강물에 휩쓸려 온 시간을 품고 있다. 그것은 물결을 붙잡은 존재가 아니라 물결을 통과한 존재다. 오랜 세월 동안 부딪히고 깎이고 다듬어지며 매끈해진 조약돌의 형상은 곧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흘러간 시간을 되돌리는 일이 아니다. 그것을 다시 읽고 새롭게 의미화하는 일이다. 한길수 시인의 시는 바로 그 지점에서 탄생한다.
이 시집의 또 다른 특징은 안부의 시학이라 부를 만한 세계관이다. 시집에 등장하는 자연은 침묵하는 풍경이 아니다. 나무와 꽃, 강물과 새들은 모두 대화의 상대다. 「무한의 서사에게」에서 시인은 “살아 있는 모든 자연에게 안부를 묻고 싶”다고 말한다. 여기서 안부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행위다.
그러한 태도는 「부부」에서 더욱 따뜻하게 드러난다. 돌담처럼 살아온 세월 속에서 생긴 수많은 틈을 서로가 메워 주며 살아온 삶이 그려진다. 집은 낡고 기울어질 수 있지만 그 안에 쌓인 금슬은 무너지지 않는다. 「병원 가는 여자」 역시 일상의 사소한 장면을 통해 사랑이란 결국 상대를 돌보는 일임을 보여 준다. 사랑은 격정적인 감정보다 오래 함께 살아낸 시간에 가깝다.
한편 시집 후반부에서는 자연과 기억의 세계를 넘어 존재론적 성찰이 더욱 깊어진다. 「수취인 불명」, 「이상 징후」, 「메타버스」 같은 작품에서는 시간과 기억, 실재와 부재의 문제가 탐색된다. 특히 「메타버스」는 디지털 시대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결국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을 말한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인간의 본질적인 외로움과 그리움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물론 한길수 시인의 시는 최근 한국시의 실험적 경향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난해한 비유나 해체된 언어보다 체험에서 우러난 진솔한 진술을 택한다. 때로는 서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의미가 비교적 명료하게 전달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함이라기보다 시인의 선택에 가깝다. 삶의 진실을 어렵게 말하기보다 오래 살아낸 사람의 언어로 전하려는 의지이다.
『물결은 보내고 나는 남아서』는 떠난 것과 남은 것, 과거와 현재, 삶과 상실 사이의 간격을 응시하며 그 사이에 놓인 끝없는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시인은 그리움을 통해 사라진 것들을 다시 현재로 불러오고, 안부를 통해 존재와 존재를 이어준다.
결국 한길수 시인의 시는 묻고 있는 것이다.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무엇이 남는가를. 그리고 그 답을 조용히 들려준다. 물결은 흘러가도 그 물결을 기억하는 마음은 남는다고. 사람은 떠나도 함께 나누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리하여 그의 시는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끝내 서로의 안부를 묻는 따뜻한 언어로 남는다.
책 속에서
세월의 강을 떠돌다
어느 야트막한 모래톱에
물결은 보내고 나는 남아서
뜨겁게, 뜨겁게
지난날을 굽어보는 것이냐
물결에 흘려보낸
무수한 생각의 부스러기
모래알처럼 수북해서
다시 읽을 수는 없지만
굴곡 많은 시간을
다듬고 다듬어
매끈한 표정으로 너는
거칠게 살아온 젊은 날을
매만지고 있구나
- 「조약돌」
벼이삭 익어 겸손해지는 날엔
스치는 바람에게 안부를 묻고 싶습니다
붉은 등을 켜 놓은 듯 꽈리밭 환한 날엔
떠도는 뭉게구름에게 안부를 묻고 싶습니다
밤비치길을 걸으며 도처에서 만나게 되는
살아 있는 모든 자연에게 안부를 묻고 싶습니다
무한한 풍경 속 존재의 계곡을 노래하며
침묵의 메아리가 삶의 가장자리를 서늘하게 스칠 때
우리 어느 길섶에서 느낌으로 마주한다면
설레는 옷깃으로 안부를 나누고 싶습니다
공허한 삶의 주름살을 버리고
시간을 소비하는 허망의 절정 속에서도
안부를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 「무한의 서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