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생활의 미시사, 그리고 그 안의 큰 슬픔
시집은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부는 서로 다른 결을 지니면서도 하나의 시선으로 수렴된다. 〈1부. 패랭이꽃 아버지〉는 밥상머리 훈육, 유통기한 지난 식품, 텃밭을 침범하는 고라니 같은 생활의 미시사(微視史)에서 출발해 결국 아버지의 죽음, 유년의 상실로 확장된다. 특히 연작 「고라니 간식 1·2·3」은 이 시집의 미덕 혹은 미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텃밭을 망치는 짐승에 대한 원망이 어느새 슬그머니 “같이 먹자”라는 화해와 공존의 언어로 옮겨가는 과정은, 분노나 상실에서 출발하되 결국 생명에 대한 연민으로 귀착하는 손한옥 시편들이 지닌 특유의 궤적을 잘 보여준다.
〈2부. 빛 속의 나와 빛 밖의 나〉에서는 시인 자신의 투병 경험-혈변으로 실려간 응급실, 열세 시간의 수술, 오십 바늘의 봉합 등-이 전면화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결코 신파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자신을 “슬픈 코스모스”에 비유하며 “다름으로 이룬 조화의 꽃”(「나의 코스모스」)이라 명명하는 대목에서 볼 수 있듯, 병증조차 자기 위안이나 값싼 극복담이 아니라 삶과 나란히 걷는 동반자로 받아들여진다. 다육식물을 키우는 행위-“사막이 태생인 작은 몸”(「사막의 배후」)에 물을 주는 일-는 이 시기 시인의 존재 방식을 은유하는 핵심 이미지로 자리 잡는다.
표제작이 놓인 자리
3부의 제목으로 쓰였고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모자 아직 있고 이 치마 이제 없다」는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며 쓴 시다. 젊은 날 출사를 다니던 시절의 주홍빛 모자와 치마-모자는 빛바래지 않고 남아 있지만 치마는 “폭풍에 날아가던 날”만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대비는, 이 시집 전체가 겨냥하는 시간의 문제를 하나의 이미지로 응축한다. ‘남아 있는 것과 사라진 것, 그 사이의 낙차가 곧 시가 태어나는 자리’라는 것을 이 표제시는 담담하게 말해준다.
파격, 웃음이라는 전략
이번 시집의 가장 이채로운 대목은 어쩌면 「남자, 그 영원한 소년」이라는 시 한 편으로 채운 마지막 4부에 있지 않을까. 앞선 1, 2, 3부의 애도와 통증의 정조에서 벗어나, 오롯이 남편이라는 존재를 관찰 보고서 형식으로 유쾌하게 해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극상”, “비우기”, “닭 쫓던 개” 같은 소제목 아래 펼쳐지는 관찰들은 풍자와 애정이 뒤섞인 특유의 화법으로, 자칫 지나치게 무거워질 수 있었던 시집 전체에 숨통을 틔운다.
시인 스스로 발문에서 “소년 같은 남자를 분해할 수 있어서 무한 다행”이라 밝히듯, 이 파격은 단순한 여담이 아니라 시집을 완결 짓는 의도된 구성적 장치로 읽힌다.
직설이 도달하는 곳
발문에서 박제영 시인이 말한 것처럼 손한옥의 언어는 “직설로 곡해(曲解)를 짓고, 곡해 속에서 말의 진경(眞景)을 펼쳐 보이고, 마침내 삶의 정곡(正鵠)을 찌른다.” 이 시집이 증명하는 것은, 직설이 반드시 단순함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오랜 시간 벼려온 언어만이 에두르지 않고도 삶의 복잡한 결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어록, 오빠의 부재, 남편과의 오십 년, 다육이와 고라니와 달팽이-이 모든 존재들을 향한 시인의 시선은 한결같이 정직하면서도 따뜻하다.
손한옥의 시집 『이 모자 아직 있고 이 치마 이제 없다』는 상실을 응시하되 거기 눌러앉지 않고, 통증을 말하되 자기 연민으로 흐르지 않는 시집이다. “죽어도 다시 피어날 원초적 봄빛”(「색감에 미래 있다」)을 믿는 시인의 목소리는, 여덟 권째에 이르러서도 조금도 무디어지지 않았다.
· 시인의 말
빛 속의 나와 빛 밖의 나를 찾아
먼 길을 왔다.
엎드린 무릎 앞에 놓인 산
모든 유위법은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인 것을
금강경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을 보았다.
2026년
손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