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내가 캠퍼스에서 접한 마르크스주의는 인간과 세계를 대립과 투쟁의 관계로 읽었기 때문에 이미 존재하는 갈등을 혁명적 투쟁으로 밀고 가려 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멈칫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길을 어디까지 따라갈 수 있을까. 불의를 향한 분노는 정당했다.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 서야 한다는 요구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을 미워하고, 적을 제거하고, 원수를 절멸하는 방식이 과연 복음의 길일 수 있을까. 나는 전두환을 미워했지만 각을 뜨자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기독교는 ‘용서와 화해의 정치학’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한가운데에는 용서가 자리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정의가 반드시 서게 될 것이라는 말도 기독교의 중요한 선언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의 마지막 말은 아니다. 기독교의 마지막 말은 용서를 통한 화해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추구하는 용서의 정치학은 개인과 집단의 잘못을 처벌과 복수로만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자비와 용납을 통해 갈등을 넘어 정의와 관계 회복을 지향하는 정치적 윤리다. 복음은 악을 악이라 부르되 악인을 죽이는 것을 역사의 마지막 말로 삼지 않는다.
--- p.78~79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성숙의 방향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지 않다. 무조건적 수용 속에서 존재의 안정을 얻는 동시에 법과 책임 속에서 자기 삶을 형성해 가는 것. 품어 주는 사랑과 일으켜 세우는 요구, 위로와 훈련, 은총과 책임을 함께 통합하는 것. 그것이 성숙한 신앙이다. 사랑은 안식처이면서 길이고, 품이면서 부르심이다.
나는 그날 통일호 안에서 두 사랑을 한꺼번에 만났다. 정의로운 아버지의 사랑과 아낌없이 내어 주는 어머니의 사랑. 지상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천상의 하나님을 본 셈이다. 그렇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참지 못하고 심판하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잃어버린 자를 향한 무조건적인 용서와 무한한 사랑이야말로 최종심급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마지막 고백이다. 엔도의 말로는 ‘부-모 하나님’, 나의 언어로는 ‘아빠 하나님, 엄마 하나님’. 이것이 제1계명의 하나님에 이어 내가 만난 두 번째 하나님이다.
--- p.97~98
가난하다 보니 필요한 책을 다 사줄 수 없었다. 부산 동구도서관에서 빌렸다. 처음에는 한 사람당 세 권, 네 식구면 열두 권을 빌릴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대출 한도를 조금씩 늘려 주었다. 어느덧 한 사람당 열 권까지 빌려주었다. 그러면 마흔 권이었다. 그 마흔 권을 어떤 날은 양손 가득 들고, 어떤 날은 배낭에 지고 오르막 언덕길을 걸어 집까지 날랐다. 배낭끈이 어깨를 파고들었다. 중턱에서 한 번은 쉬어야 했다. 기한이 되면 반납하고 다시 빌렸다. 그 일을 쉬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 걸은 길이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언덕이 우리 집 서재였다.
--- p.172
일하는 목회자라야 성도의 삶을 안다고들 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상반된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갖고 있다. 교회 역시 하나의 조직인 이상 목회자들도 이미 세상살이를 충분히 경험하고 있다. 일반 회사의 까다로운 직장 상사나 동료, 후배 못지않을 정도로 못살게 구는 사역자와 중직자, 교인이 적지 않다. 모든 교인이 모든 직업과 세상의 전모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교회 안에는 교인의 숫자만큼 세상이 들어와 똬리를 틀고 있다. 더 이상 무슨 세상을 알아야 할까? 목회자도 나름 생고생이다.
그렇지만 교회라는 시공간이 행동반경의 전부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는 세상이 넓은 것과 남의 세상을 아는 것은 다르다. 신학교 졸업 후 교회에서만 활동한 목회자들은 주일예배 출석을 비롯해 각종 봉사와 십일조를 지극히 당연하게 여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교인들을 은근히 정죄하기 쉽다. 왜 교회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느냐며 다그치거나 헌신을 종용하기 일쑤다. 평일이면 정신없이 일하다가 퇴근해서 가족들을 건사하고, 주일 하루는 가족과 생이별해서 파김치가 되도록 교회에 봉사하는 교인들의 내적 소진을 봐주지 않는다. 나 역시 밖으로 나가 보고서야 그 얼굴들이 보였다.
--- p.174~175
청소년인문학교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당연하지만 글쓰기 실력이 는다. 처음에 못 쓴다고 위축되는 아이들이 많다. 당연하다. 써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매주 한 편씩 쓰다 보면 어느 순간 달라진다. 스스로도 안다. 예전에 쓴 글을 보면서 ‘내가 저때는 저렇게 썼구나’ 하고 웃는다. 억지로 훈련해서가 아니다. 쓰다 보니 성장한 거다. 글이 자라는 만큼 생각도 자란다. 변화는 글에서도 보이고 말에서도 나타난다.
책이 재미있어진다. 책을 싫어해서 온 아이들이 적지 않다. 부모가 보내서 왔는데, 하다 보니 책과 가까워진 거다. 이유가 있다. 읽고 끝내지 않기 때문이다. 쓰고, 말하고, 친구들 이야기를 듣는다. 내가 놓친 것을 옆 친구가 짚어낸다. 그게 재미있다. 혼자 읽을 때는 몰랐던 맛이 거기서 난다. 책은 혼자 읽는 것이 아니라 같이 읽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이 몸으로 배운다. 글을 쓰면 내가 일대일로 첨삭해서 돌려준다.
같이 읽으니 생각이 깊어지고 넓어진다. 평소에 친구들과 이런 얘기 못 나눈다는 말을 아이들이 자주 한다. 정치 얘기 꺼내면 손사래를 친다고. 그런데 여기서는 다방면의 주제를 심도 있게 나눈다. 기독교인도 있고 비기독교인도 있다. 찬성도 있고 반대도 있다. 내가 떠올리지 못한 생각을 옆 친구가 말한다. 사람이 다면적이고 세상이 흑백이 아니라는 진실을 모임 안에서 배운다.
그렇게 아이들은 자아가 단단해진다. 청소년기는 방황해야 한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고, 교회가 싫고, 왜 이래야 하느냐며 따지는 시기다. 나는 그걸 하라고 한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질문해야 나중에 흔들리지 않는다. 물렁물렁 시키는 대로만 하다가는 대학에 가서 무너지기 쉽다. 비판받지 않는 안전한 자리에서 마음껏 의심하고 질문하는 일, 그게 아이들을 강단 있게 만든다.
--- p.21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