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 사계절 ‘옛이야기그림책’시리즈를 시작하며 *
“옛이야기는 어린이들에게 다른 어떤 이야기들보다도 인간의 내면 문제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주고, 또한 어린이가 처한 난관에 알맞은 해결책을 제시한다. …… 옛이야기가 왜 어린이들의 내면적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가를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나는 그것이 다른 어떤 책보다도 어린이의 심리와 감정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옛이야기는 어린이들이 무의식적으로 겪는 심각한 내면적 억압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내적 갈등을 소홀히 다루지 않으며, 그것에 대한 즉각적이고도 지속적인 해결책을 제공한다.” -『옛이야기의 매력』,브루노 베텔하임
어린이 심리 치료 전문가이며 옛이야기 연구자인 브루노 베텔하임(1903~1990)은 저서 『옛이야기의 매력』을 통하여, 옛이야기가 어린이의 내면을 풍요롭게 해 주고 어린이가 성장과정에서 부닥치는 난관들을 극복해 나아가는 데 힘을 주는 훌륭한 어린이문학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굳이 학자들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어린이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옛이야기야말로 어린이에게 흥미와 위안을 주는, 어린이를 위한 문학이라는 사실에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옛이야기는 수없이 많은 변주를 거치면서 다종다양한 형태의 어린이책으로 출간되어 왔습니다. 그림책 분야에서도 옛이야기는 가장 기본적인 아이템으로 다루어져, 그림책을 내는 전집 출판사치고 ‘옛이야기그림책 전집’ 한 질 쯤 갖추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며, 단행본 시장에서도 어지간한 규모의 유아 전문 출판사들은 저마다 옛이야기그림책 시리즈를 전집 규모로 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옛이야기그림책의 질적인 수준은 몇몇 작품들의 성취를 제외하면 그 양적인 풍성함에 비해 아직 만족스럽다 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수요를 좇는 데 급급한 제작 관행이 작가들로 하여금 옛이야기의 문학적 심층에 천착하여 그 깊이를 드러낼 여지를 갖지 못한 채 단지 스토리를 재현하는 데에 그치도록 한 탓이 크다고 볼 수 있겠지요.
옛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민중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오면서 한껏 다듬어지고 고도로 양식화한 상징과 은유의 문학이자, 사회적 약자로서 민중의 꿈과 욕망이 담긴 해방과 위안의 문학입니다. 따라서 옛이야기를 그림책으로 재화할 때에는 거기에 담긴 상징과 은유, 꿈과 욕망을 해석해 내는 연구자의 자세와, 그것을 다시 시각적이고 문학적인 수사로 풀어내는 이야기꾼의 기질, 그리고 무엇보다도 약자인 어린이의 꿈과 욕망을 보듬고 이해하고자 하는 진정성이 필요합니다.
‘사계절 옛이야기그림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안고 출발합니다. 한 권 한 권 연구하는 자세로 만들어 가고자 하는 이 그림책들이 어린이의 내면을 살찌우고, 어린이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힘과 용기, 꿈과 위안의 밑거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작품 소개 *
>> 무서운 옛이야기그림책, 『여우누이』
어린이들은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면 이불을 뒤집어쓰면서도 계속하라 재촉하며 귀를 기울입니다. 정신의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공포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방어기제’로 설명합니다. 현실에서 겪게 될지 모르는 공포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이야기라는 안전한 공포체험을 즐기려 한다는 것이지요.
‘여우누이’는 그러한 ‘안전한 공포체험’으로서의 이야기들 가운데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표적인 옛이야기이며, 이 책은 그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무서운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재화할 때에는 그 무서움의 근원이 어떤 것인가를 해석해 내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여우누이’의 무서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림책 『여우누이』는 그것을 ‘소외’의 공포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아들을 셋이나 둔 부자가 딸 두기를 소원하여 날마다 서낭에서 비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바라던 딸을 낳았으나 그 뒤로 괴이한 일이 일어나지요. 자고 나면 소와 말이 하나씩 죽어 있는 것입니다. 공포는 이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가축들이 하나씩 죽어 가는 괴기스러운 현상, 그러나 까닭을 알 수 없음, 그것은 사건이 일어나는 때가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시간인 ‘밤’이라는 점과 어울려, 알 수 없는 어떤 힘으로 인하여 현실로부터 소외되는 공포감을 자아냅니다.
까닭을 알기 위해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밤을 지킬 것을 명령합니다. 그런데 범상한 두 아들은 잠을 이기지 못해 사실 규명에 실패하고, 주인공인 셋째아들만이 가축들을 잡아먹는 괴물이 바로 누이동생이라는 진실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셋째가 목격한 진실을 부정합니다. 이 때 또 한 번 공포가 엄습합니다. 나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부정당할 때, 세계로부터 철저히 소외되는 두려움이 닥쳐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우누이’의 공포는 괴기스러운 캐릭터나 무서운 감정의 표출, 피비린내 나는 현장감 따위에서 연출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그림책 『여우누이』는 감정이 모두 증발된 무표정한 캐릭터들, 진실이 부정되는 막막한 분위기, 폐쇄된 그림틀로써 나누어 놓은,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지배하는 공간의 표현 등으로 공포의 분위기를 설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진실을 알고 있는, 그래서 소외된 셋째아들을 독자의 대리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