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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아는 사람 집”을 내 속에서 짓지 않는 한,
나는 시를 쓸 수가 없으리라는 것을

허수경 시인의 마지막 산문집 『아는 사람 집』이 그의 유고 시집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에 뒤이어 출판사 난다에서 출간됩니다. 허수경 시인이 남기고 간 노트북에는 출처 없이 저장된 몇 편의 파일만이 남았습니다. 일부 원고는 제목만 있었고, 일부는 웹진 『민연』의 이름을 단 채로 존재했습니다. 2011년 고려대학교 웹진 『민연』에 연재를 시작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디까지 연재했는지, 몇 꼭지나 썼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시작점을 아는데 끝점을 모르는 상태. 오래전 도메인은 삭제되었고 웹진이 사라진 지도 10년이 넘었기에 그간 이 글들을 한데 책으로 꿰는 데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시간이 지나 유고 시집을 내면서 파편적으로 놓여 있던 원고의 주인을 찾기 위해 당시 시인의 담당 편집자였던 임형수 선생(현 충북대 사학과 교수)의 도움으로 오래전 메일함에 남아 있던 연재 원고 전부를 넘겨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껏 삭제하지 않고 간직하고 있던 메일이라니요. 노트북에 남아 있던 원고와 메일함 속 원고는 모두 같았습니다. 그렇게 비로소 파편들의 제목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는 사람 집』이라는 제목은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초판 2001, 창비)에 실린 시 「바다가」에서 빌려왔습니다. 제목이 지어진 이후, 아는 사람과 죽은 사람은 결국 내가 ‘아는 사람’으로 불리고, 집이니까 무덤이어야 하나 하다가, 다시 시인의 노트북을 펼치고 발굴터 다닐 적 찍힌 몇만 장의 사진을 다시 열어보았습니다. 2007년 하튜사에서 찍힌 사진, 앞이 아닌 등이 나온 사진. 이게 허수경이지요, 뒤만 봐도 허수경입니다. 이건 편집자가 만든 책이 아닌, 허수경 시인이 무덤에서 나와 만든 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기일인 10월까지 미룰 것이 아니라 유고 시집과 함께 나와야 하는 책이라 여겼습니다. 모든 인간은 앞보다 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을 보면 알 수 있듯 시인의 등도 우리에게 말을 거는 듯합니다. 집도 아닌 발굴터에 가서 있던 허수경 시인은 그때 그는 무엇을 쓰고 있었을까요. 우리가 만들었지만, 우리가 만들었다고 하기 힘든 책, ‘모든 인간은 앞이 아니고 뒤로구나’ 여실히 느끼게 하는, 그의 유고 산문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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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작가의 말 4

1부
발터 벤야민이 꾼 꿈 이야기 11
왜 ‘분노하라’인가? 15
알레포 알레포 19
잊혀진 전쟁과 자본주의의 어떤 불길한 표정 25
고골의 「외투」를 읽는 2012년 12월 31
한 시대에 대한 ‘농담’ 39
백 밀리언 유로 남자 45
선택할 수 없는 것들 51
상징의 여러 얼굴 55
수염을 단 여성 61

2부
‘수메르 문명’이라는 것 69
외국에서의 꿈, 혹은 산책 73
흑백사진 한 장 83
인천공항의 추어탕 89
이야기를 쓰는 마음, 읽는 마음 93
손삽 97
어느 날의 시작 메모 103
시인됨의 곤욕을 함께 이끌면서 107
새 이웃 113
바쿠는 오늘도 오지 않고 121
저자 소개
저자 : 허수경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자라고 대학 역시 그곳에서 다녔다. 오래된 도시, 그 진주가 도시에 대한 원체험이었다. 낮은 한옥들, 골목들, 그 사이사이에 있던 오래된 식당들과 주점들. 그 인간의 도시에서 새어나오던 불빛들이 내 정서의 근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밥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고 그 무렵에 시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봉천동에서 살다가 방송국 스크립터 생활을 하면서 이태원, 원당, 광화문 근처에서 셋방을 얻어 살기도 했다.

1992년 늦가을 독일로 왔다. 나에게는 집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셋방 아니면 기숙사 방이 내 삶의 거처였다. 작은 방 하나만을 지상에 얻어놓고 유랑을 하는 것처럼 독일에서 살면서 공부했고, 여름방학이면 그 방마저 독일에 두고 오리엔트로 발굴을 하러 가기도 했다. 발굴장의 숙소는 텐트이거나 여러 명이 함께 지내는 임시로 지어진 방이었다. 발굴을 하면서, 폐허가 된 옛 도시를 경험하면서, 인간의 도시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았다. 도시뿐 아니라 우리 모두 이 지상에서 영원히 거처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사무치게 알았다.

서울에서 살 때 두 권의 시집『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혼자 가는 먼 집』을 발표했다. 두번째 시집인『혼자 가는 먼 집』의 제목을 정할 때 그것이 어쩌면 나라는 자아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독일에서 살면서 세번째 시집『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를 내었을 때 이미 나는 참 많은 폐허 도시를 보고 난 뒤였다. 나는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했다. 물질이든 생명이든 유한한 주기를 살다가 사라져갈 때 그들의 영혼은 어디인가에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 공부하기를 멈추고 글쓰기로 돌아왔다. 그뒤로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산문집 『모래도시를 찾아서』 『너 없이 걸었다』, 장편소설 『박하』 『아틀란티스야, 잘 가』 『모래도시』, 동화책『가로미와 늘메 이야기』 『마루호리의 비밀』, 번역서 『슬픈 란돌린』 『끝없는 이야기』 『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 『그림 형제 동화집』 등을 펴냈다.

동서문학상, 전숙희문학상, 이육사문학상을 수상했다. 2018년 10월 3일, 독일에서 투병 중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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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허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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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시? 천천히 천천히 하자, 돌아올 거다, 다시 나에게로, 나의 시가
그 꿈속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바다가 보였다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는 시인은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바다를 보았다. 독일로 와서 그는 바다로 갈 기회가 없었다. 바다는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들어갈 수 없었다. 그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에. 손도 눈도 혀도 없어서 그 바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을 시인은 “아는 사람 집”에 다 두고 왔기에. “바다는 검고 깊어서 그 안에는 수많은 시어가 출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나는 단 하나의 시어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아니면 시가 되지 못했던 시간들이, 아니면 여러 시적 자아들이 그도 아니면 수많은 이미지가 시 자체의 무의식이 모여 그 바다는 출렁이고 있었다.”(「외국에서의 꿈, 혹은 산책」)

“바다가 안기지 못하고 서성인다 돌아선다/가지 마라 가지 마라 하고 싶다/혀가 없다 그 어디인가/아는 사람 집 그 집에 다 두고 왔다”(「바다가」,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잠에서 깨어 종이에다 꿈을 옮겨 적고 난 뒤 드디어 시인은 알게 되었다. 이제 아주 괴로운 날들이 오리라는 것을. 독일이라는 곳에서 살고 공부하면서 그는 많은 것을 얻었는데 정작 자신의 시를 서서히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에서 육 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정작 시를 쓸 수 있는 모든 기관과 마음은 아직 그곳에 두고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꿈 뒤에 알게 된 것. “모든 것을 다 두고 온 “아는 사람 집”을 내 속에서 짓지 않는 한 나는 나는 쓸 수가 없으리라는 것을.” 그런데 도대체, 이 독일 도시에는 없는 나의 “아는 사람 집”은 어떻게 생겼을까? 아님 이 독일 도시에 이미 “아는 사람 집”이 있는데도 그는 보지 못하고 있을까? 도무지, 시의 일생을 끌고 나갈 그 “아는 사람의 집”은 어디에 있을까? 그는 옥수수 밭을 오래 바라보며 진짜 고독은 이제 시작되었다는 것을 뼛속까지 짐작했다. 그 고독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아는 사람 집”은 아직 시인의 속에서 보이지 않고 그는 이 대학 도시에서 계속 산책중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하여 문학의 윤리성을 강조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다만 문학이 한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의 전통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 같은 것만이 떠오를 뿐이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뚜렷하게 소수자로 구분이 되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소수자의 경계가 그렇게 분명하고 뚜렷하지 않은 시간 속에 우리는 산다는 것.” 발터 벤야민의 꿈속에서 괴테는 쓰기를 멈추고 고대의 꽃병 하나를 벤야민에게 선물했다. 식사를 마치고 벤야민이 괴테의 팔을 살짝 건드렸을 때 벤야민은 울기 시작했다. 꽃병이 아마도 괴테와 벤야민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유럽문명을 관통하는 전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벤야민은 어쩌면 나치 독일 사회 속에서 전대미문의 핍박을 당할 유대인의 운명을 예감한 것은 아닐까.(「발터 벤야민이 꾼 꿈 이야기」)

2013년 콘치타 부르스트가 오스트리아를 대표해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참여하는 것이 발표되자 오스트리아는 술렁거렸다. 드래그 퀸의 모습이 방송에 중계될 경우 청소년의 성적 지향에 영향을 끼치고 성 문란을 조성할 것이라는 이유로. 콘치타 부르스트는 묻는다, 만일 당신이 나처럼 태어났다면,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시인은 말한다. “자신의 정체성이 다수에 속해 있으므로 내 정체성은 자연이고 소수자의 정체성은 죄악이라는 태도는 언젠가는 조직적인 폭력으로 나아갈 것이다. 나치처럼, 수많은 소수를 죽음으로 몰았던 어떤 역사처럼.”(「수염을 단 여성」)

시리아의 두번째로 큰 도시인 알레포. 인간의 역사에서는 그곳이 잠깐 전쟁 휴지기였던 시기 시인은 그곳에 방문한 적이 있다. 시인은 도시의 낭만에 자신을 잠수시킬 수 있었고 저녁이 오자 그 도시의 노을에 기대어 멀리 있는 이들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 도시 근교를 어슬렁거리는 양들은 울면서 도시의 노을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내가 그 도시에 머물 때 나는 십여 년 뒤에 이 도시가 다시 전쟁에 휩쓸릴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알레포 알레포」)

한 인간이 93세가 되면 무슨 말을 후학들에게 할 수 있을까.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고 말한다. 잿더미만 남은 이차대전 직후보다 지금이 더 풍요로운데 왜, 그때는 모두가 동의하던, 그리고 정열로 밀고 나가던 그 프로그램들이 지금, 우리는 왜 위기에 처해 있는가. 그래서 그는 말한다. 분노하라고, 젊은 당신들이여, 분노하라고, 분노에서 저항은 나온다고.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낙담이야말로 이 세상을 이렇게 지속하게 만드는 거라고.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은 저항을 하는 것. 저항의 의미는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이기에.(「왜 ‘분노하라’인가?」)

작가의 말

섞이자.
말은,
한 인간의 말은 아주 순수하고도 순수하니
순수한 제 말만이 있다, 라는 철조망을 넘어버리자.
조금이라도 벗어나자.

스민 말들이 짜놓은
세계의 양탄자 위에 미끄럼틀을 놓고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자, 야호!
다시 내려오자, 야호!

우리가 순수한 말이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자유롭다면
어떤 경계는 풀려 말은 우리로부터 자유로우리.
우리도 말에게서 자유로우리.

어떤 말도 순수 혈통이 아니며 단일하지 않으며
우리에게는 지킬 말이 있는 게 아니라
경계를 열어 받아들일 말만이 있으리.
낯선 말들을 받아들이자.
섞이자.

2013년 가을
허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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