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초판본 시인의 말
여기는
처마 밑이거나 객석일 거다
2012년 봄 임곤택
복간본 시인의 말
무엇인가 멀어졌고 어딘가는 더 가까워졌다
아침과 나무와 반복하는 몇몇 이미지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렇게 침침한 채로 아침을 맞고 나무 사이를 걷는다
2026년 봄 임곤택
책 속으로
당신이 지어 준 죄를 갖고 나는 태어났다
당신을 닮은 들판과 들판의 소나무를 닮는 일
나는 서두른다
허공의 거대한 활을 보았으므로
당신으로부터 낱낱이 적중하는 나는 광기 들린 나뭇잎
하나의 몸으로
어떻게 여러 번의 추락이 가능한지
물과 소금은 잠시 혀를 지나고
열 개의 바람개비가 돈다
열 개의 종잇장 같은 바람이
노인의 얼굴을 덮고 그네 뒤로 숨는다
한 조각 마른 빵에 몰리는 푸른 거품
주인이 바뀐 폐염전 바닥에
반짝거리는 빛
확인하고 싶은 사랑이 있다
---「그대에게 닿는 허기」중에서
물속의 제 얼굴을 가지려던 그이처럼
세상은 가난하고 야윈다
땅 위에 흰 젖을 뿌리는 목련의 나라
아버지가 알려 준 것은 반드시 슬픈 것
---「4월」중에서
너의 비극이 탐날 때 ‘네가 제일 예뻐’라고 말하지
너의 고독한 때가 탐날 때‘ 네가 제일 예뻐’라고 말하지
네가 온순해지면 아무도 너를 그리워하지 않고
우리는 거짓말을 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용서했다
짓는 대로의 낯빛으로 증오가 잦아들고
아름다운 노래는 불리지 않고도 끝내 아름다운
그런 세상으로
---「우리는 서로의 입을 막고」중에서
간밤의 꿈을 한 조각도 줍지 않고 아침을 맞는다. 문을 두들기는 햇살의 행상行商, 동분서주의 수다스런 자투리들. 찬물 한 컵으로 어제의 나 모른 척하기, 어제와 다른 말투로 말하기.
골목은 길고 수다스럽다. 한물간 사내들이 모여 소줏값을 걱정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의 비린내. ‘기표소’라고 쓰인 휘장을 젖히고 처음 맡았던 냄새. 나란히 번호를 붙인 사생결단의 빈칸들.
어린 연인들이 좁은 골목으로, 잘 맞는 신발처럼 척척 나아갈 때, 가장 먼저 서쪽에 닿은 사람은 아침 인사의 격식을 이해한다. 방바닥에 그려지는 긴 수형도. 일몰은 너무 재빨라 한 장으로는 다 그릴 수 없지.
---「그림 맞추기」중에서
귓속말을 하고
귓속말을 듣고 싶은 때
비 올 확률 80퍼센트의 대기
빛 쪽으로 몰리다가 휘발하는 손톱
예언자의 손가락질로
빈 병을 집어 드는 누더기의 사내
애초부터 그쯤에서 그렇게 멈춘 것 같은
너의 발밑 팽팽하게 당겨진 길
녹슨 가위
---「비 갠 다음의 K씨」중에서
플라타너스가 플라타너스 가지를 사방으로 뻗는다
오늘은 뭔가 자꾸 줄어든다
짐승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면
할 수 있는 일이란 잠시 이름을 바꾸는 것
세탁소 주인의 물음에 가명을 대고
한 생애를 약간 들어 올렸다고 믿는다
---「이름을 바꾸다」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햇볕
바람과 이파리는 점점 무거워진다
잦아드는 그의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고 생각하는 그녀처럼 나는 있는 것을, 없다고 느낀다
---「기미」중에서
삶에서 기묘하게 어긋나 있는 것들, 감정 그대로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들, 어느 한순간에 찾아든 저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태, 그 어떤 희망이나 심지어 절망조차 부여잡기 힘겨운 존재들의 다변적인 모습을, 마치 한 삽에 움푹 찍어 흙을 나를 때 그렇게 하듯, 그것도 “너무 빠르거나 놀랄 만큼 느리지 않게”(「10월」), 시집 안으로 옮겨다 놓는 일에 몰두할 뿐이다. (…) 연시戀詩의 형식을 차용해 온 작품들에서조차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따라서 사랑 타령이나 감정의 기울어짐이 아니다. 가령 “백 일은 붉고/백 일은 없는 내 사랑” 같은 구절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사랑의 속성이 아니라, ‘붉거나 그렇지 않은’이라는 고리타분한 이항 대립적 반복의 굴레로 하루가 채워진다는 것이며, 우리의 처절한 삶과 애절한 사랑조차 알고 보면 이렇게 “흔한 이야기(「그대에게 닿은 허기」)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해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