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박정호에게 마음은 세계와의 연결성을 근거 짓고 세계로부터 빌려온 시간을 통해서 주체를 풍요롭게 건축하는 자리이다. 그 마음은 ‘한 평’과 같이 좁은 자리만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욕망이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지평을 축소하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체는 마음을 품고 살아내 주체의 자리를 건축한다. 이때 마음의 건축은 언어를 통해 이뤄진다. 그리고 언어의 건축물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상실한 세계와의 연결성을 회복할 ‘끈’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 회복의 가능성은 우리 앞에 생기하며 동시에 은폐된다. 그 은폐로 인해 가능성은 현실화되지 못한 채 해결 불가능성으로 남는다. 또한 그 가능성은 늘 멀어진 거리로만 가늠된다. 회복은 늘 타자적 가능성으로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마음 한 평』에서 박정호는 바로 이러한 이미지의 건축을 수행했다. 주체의 안으로 불러온 빌려온 시간, 시간 그 자체를 주체의 주관적 지속 시간 속에서 시간 이미지로 빚어낸 작업을 수행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간을 주체로 흘려 들여 보내 이미지로 결집시키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가 다른 시인들보다 더딘 듯 시작을 이어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근본적인 시 짓기, 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길어내는 샘으로 이끄는 언어를 구축하는 일은 그토록 지난한 일인 것이다.
21세기 모든 정보가 가산되는 데이터로 환원되는 시대에 이러한 시는 주목받기 어렵다. 이 시대에 모든 것은 비의를 상실하고, 이미지를 상실한다. 모든 것은 데이터화로 투명해진다. 이러한 시대에 시는 시적 언어가 가진 힘을 상실한다. 시는 팬시상품과 같은 지위에 놓이게 되었고, 시는 부분적으로 파편화된 채로 매끄러운 화면의 타임라인 위에서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소비되는 미문들로 전락한다. 한병철은 『리추얼의 종말』에서 이러한 시대에 근원적인 시의 특성은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시적 근원으로 나아가는 시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기에 아직 시가 있다.
디지털 시대의 시 담론의 바깥에 비가시화되어 있으나 시가 본래적으로 바깥의 시간에 곁해 있음을 잊지 않는 시가 있다. 그런 시를 통해 우리를 존재의 근원지로 이끄는 이정표가 되는 시를 쓰는 이가 있다. 그는 시 짓기의 시간이 빌려온 시간이며, 그 시간을 통해 시간이 우리에게 환기하는 바깥을 내부로 들여올 수 있음을 노래한다. 그가 구축한 시간의 이미지들은 그렇게 바깥의 곁에서 서서 오랜 시간 이미지의 길들을 걸으며 획득한 것들이다. 이 시간이 우리에게 존재의 근원인 거주처를 지어준다. 그 거주처에는 전통과 현재가 서로의 안과 밖을 상호 침투하면서 어울려 있다. 박정호는 이러한 시를 우리에게 돌려준다. 과거와 현재를 잇고 미래의 가능성을 비치도록 이끄는 시. 그것이 이제 우리 앞에 와 있다. 시가, 언어로 피어난 꽃이, 지금 여기 우리의 거주지에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박정호는 그것이 그의 시임을 분명하게 각인시키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박정호의 이번 시집이 길어낸 시편들을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시간을 빌려와 시작하는 시가 여기를 풍요롭게 하며,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있기에. 이 시간 회복의 아름다운 절경을 많은 독자들이 맛보게 되길 기원한다.
시간을 빌려와 시작하기!
박정호의 『마음 한 평』은 중심에는 빌려온 시간의 존재론을 탐색하고자 하는 시적 주체의 사유가 위치한다. 빌려온 시간이 우리 안에서 여전히 우리의 존재적 근거가 세계에 있음을 환기하고 있으며, 그것을 환기하는 자리가 바로 ‘마음’이다. 박정호에게 마음은 세계와의 연결성을 근거 짓고, 세계로부터 빌려온 시간을 통해서 주체를 풍요롭게 건축하는 자리이다. 그 마음은 ‘한 평’과 같이 좁은 자리만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욕망이 마음의 지평을 축소하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체는 마음을 품고 살아내 주체의 자리를 건축한다. 주체의 안으로 불러온 빌려온 시간, 시간 그 자체를 주체의 주관적 지속 시간 속에서 시간 이미지로 빚어낸 작업을 수행한 것이다. 그리고 언어의 건축물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상실한 세계와의 연결성을 회복할 ‘끈’을 발견할 수 있다. -김학중 해설 중에서
시인의 말
무작정’은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었다. 세상을 알지 못하는데 정한 곳이 있을 까닭이 없다. 어디로 간다는 것은 아무 데도 가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만 하는 길이라니.
자연自然은 무위無爲함에도 온갖 생명을 길러 등을 토닥여주며 ‘오냐! 오냐!’ ‘그렇다! 그렇다!’하였다. 자연이 베풀어 준 음덕을 이제야 깨닫는다.
마음에 담은 것이 무엇이랴. 발 달린 구름 망아지처럼 쏘다니며 일갑자를 돌아왔건만, 아직도 왜 이리 미욱하고 몽매한 것인가. 세월이 깊어져서 편협하고 고약한 심보만 남았다.
아득하고 어둑한 길 위에 나무처럼 꼼짝없이 외우 서서.
2025년 5월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