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 작가가 꼽은 가장 중요한 작품이자 명실상부한 대표작
발자크의 전체 작품을 일컫는 총서명인 『인간극』은 《풍속 연구》 《철학 연구》 《분석 연구》라는 3개의 하위 그룹으로 나뉘며, 이중 《풍속 연구》는 다시 6개의 ‘장면’으로 세분된다. 1833년 최초의 전집 구상에선 ‘사생활 장면’, ‘지방 생활 장면’, ‘파리 생활 장면’만으로 이루어졌다가, 나중에 ‘정치 생활 장면’, ‘군대 생활 장면’, ‘시골 생활 장면’이 추가되었다. “19세기 풍속의 역사”를 실제 그대로 그려 보이겠노라 선언한 발자크는 이러한 분류 체계를 통해 개별 작품의 배경, 제재, 주제 등을 명료히 하고, 작품들 간 연계성을 효율적으로 제시한다.
3부작 장편 소설 『잃어버린 환상』은 1836년부터 1843년까지 8년에 걸쳐 집필되었으며, 처음에는 각기 독립된 단행본으로 순차 출간되었다.(1부 1837년, 2부 1839년, 3부 1843년.) 이후 3개 부를 한 작품으로 묶어 『인간극』 전집에 수록할 때, 발자크는 『잃어버린 환상』을 《풍속 연구》 중 ‘지방 생활 장면’ 시리즈의 맨 마지막에 위치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배치는 철저히 작가의 의도에 따른 것이며, 이어지는 ‘파리 생활 장면’ 시리즈와의 접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지방 생활과 파리 생활이 접합된 이 ‘장면’이야말로 본 작품이 말하려는 위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이다.”(「3부 서문」)
『잃어버린 환상』은 『고리오 영감』(1835)에서 시작된 『인간극』 총서의 한 축이 『사교계의 영광과 비참』(1847)으로 마무리되는 긴 여정의 본체에 해당한다. 『고리오 영감』의 여러 인물들이 그사이 저마다 사회적 입지를 굳히고 『잃어버린 환상』에 재등장하며, 『잃어버린 환상』에서 처음 시작된 뤼시앵의 일대기는 『사교계의 영광과 비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무리된다. 즉, 낱낱의 조각(개별 작품)을 이어 붙여 완성한 대규모 모자이크화(『인간극』)의 정중앙에 위치하는 작품이기에, 발자크의 『인간극』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있어 『잃어버린 환상』의 중요성은 특히 두드러진다.
■ 1부 「두 시인」: 찬란한 미래를 위해 분투하는 청년 서사의 기원
“‘소에게는 인내심이 필요한 농사를, 새에게는 무사태평한 삶을!’ 인쇄업자는 생각했다. ‘나는 소가 될 것이고, 뤼시앵은 독수리가 될 것이다.’”
『잃어버린 환상』 3부작은 20대 초반의 두 청년 뤼시앵 샤르동과 다비드 세샤르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며 겪는 시련과 성장의 이야기다. 프랑스 중서부의 유서 깊은 도시 앙굴렘을 배경으로 하는 1부에선 중등학교 시절 친구인 뤼시앵과 다비드의 우정과 헌신이 그려지고, 2부는 출세를 꿈꾸며 파리로 상경한 뤼시앵의 활약을 쫓아 무대가 옮겨간다. 그리고 마지막 3부는 파리에서 처절히 짓밟혀 상처투성이로 귀향한 뤼시앵과, 그사이 고향에 남아 사업을 일으키고자 악전고투해 온 다비드 가족의 불운을 묘사한다.
뤼시앵의 아버지 샤르동 씨는 나폴레옹 군대의 군의관이었던 외과 의사이자 탁월한 과학자였다. 그는 퇴역 후 앙굴렘에 약국을 차리고 신약 개발에 몰두했지만, 특허를 준비하던 도중 사망했다. 샤르동 씨는 대혁명 때 몰살된 뤼방프레 가문의 처녀를 구해 주려고 그녀와 결혼했고, 이로써 뤼시앵에게 절반은 귀족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 한편, 다비드는 앙굴렘 인쇄업자 세샤르 영감의 외아들로, 지독한 수전노인 그의 부친은 일자무식 무일푼에서 시작해 번듯한 집과 땅을 소유하게 된, 자수성가한 소시민이다. 아들을 파리의 유명 인쇄학교로 유학 보낸 영감은 다비드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인쇄소와 장비 일체를 반강제로 아들에게 팔아 넘기는데, 이 때문에 다비드는 아버지에게 막대한 채무를 지게 된다.
다비드와 뤼시앵은 성장 환경과 성향, 기질은 물론 외모도 정반대다. 다비드는 다부지고 옹골차게 생겼지만 심성은 더없이 부드럽고 다정하다. 다비드보다 두세 살 어린 뤼시앵은 그리스 신화 속 미소년을 닮은 놀라운 미모의 소유자로, 그에게는 작가로 출세해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꿈이 있다. 높은 이상을 세우고 빛나는 미래를 꿈꾼다는 공통점, 그리고 서로에게 부족한 점을 채워준다는 기쁨으로 두 사람은 남다른 우정을 쌓는다.